“이 세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작가 정영문 9년 만의 신작 소설집
2012년 장편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로 한무숙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문학상 최초 그랜드슬램 달성으로 큰 화제를 모은 정영문의 신작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목신의 어떤 오후』 이후 9년 만에 펴내는 이번 소설집에는 2012년부터 2016년 사이에 발표한 중단편소설 4편이 실려 있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의 소설세계의 변화를 짚어볼 수 있게 해준다. 특히 「개의 귀」와 「유형지 ×에서」는 기존 발표작에 크게 살을 덧대어 중편으로 완성시킨 작품으로, 정영문 특유의, ‘별것 아닌 것들을 사건화시키는 능력’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더이상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세상의 끝,
무엇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말하기의 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쓰는 것이 불가능한 소설의 끝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정영문 소설 속 인물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낯선 타국에 가거나 사나운 개에게 물리는 상황이 펼쳐졌을 때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어떤 것들이 정영문 소설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극적인 사건과 맞닥뜨리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서술하는 인물의 정교한 중얼거림이다. 이처럼 그가 단순히 한두 문장이 아닌, 작품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연체 문장을 통해 인물의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정영문이 생각하는 ‘진부함’의 정체와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수백 가지 정도의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을 지나치게 거듭해서 사용한 것 같았고, 때로는 아주 단순한 동작, 가령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 너무도 진부하게 여겨져, 거의 동작의 화석처럼 여겨져 그 단순한 동작조차도 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고, 어쩌다 내뱉는 탄식이 탄식의 부스러기를 내뱉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데에는 잠이라는 너무도 반복된 진부한 행위에 대한 거부도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 같았다. _「개의 귀」 중에서
다시 말해, 어떤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되는 표현들이란 이미 그 자체로 너무나 진부한 나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소설가의 작업 중 하나가 진부함의 더께를 벗겨내는 것이라 할 때,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이 진부함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정영문에게 있어 ‘생각’은, 수백 가지 정도로 한정되는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에 비해 좀더 복잡함과 풍부함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려는 것은, 진부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 ‘생각’이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 소설에 작가 개인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정영문의 이번 소설집에서 그 연관성은 한층 두드러진다. 자신의 낭독회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기를 바랄 때(「개의 귀」), 자살로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농후한 작가들의 작품만을 번역하겠다고 말할 때(「유형지 ×에서」), 우리는 소설 속 화자와 작가 정영문을 겹쳐놓으며,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이야기의 자장 안에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리무중에 이르다』를 읽으며 우리는, “마치 영영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 사람”처럼, 중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의 미로 안에서 잘못된 목적지를 향해, 그러나 끊임없이 걸어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어지럽고 매혹적인 산책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