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사고방식을 바꾼 가장 단순한 도구, 노트의 대장정!
기록과 사유의 도구가 일궈낸 위대한 문명과 문화
문명이 태동하던 시기, 싸고 편리하고 가벼워 널리 사용되던 종이는 이제 희소한 가치가 되었다. 사람들은 액정 화면을 터치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필기도구를 사용해 손으로 무엇인가를 쓰는 행위는 비일상의 영역으로 멀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창조적이고 높은 성과를 올리는 이들은 자신만의 노트를 쓰고 기록한다. 그 역설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종이문화사 전문가 롤런드 앨런은 2002년부터 그만의 일지를 작성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더 행복해지고 더 나아지는 일상을 발견한 동시에, 디지털 결과물을 내놓는 웹디자이너들마저 노트를 필수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낙서 같았던 각종 목록과 도표, 스케치가 경이로울 만큼 훌륭한 아이디어와 결과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며 그는 질문을 던진다. 노트와 창의성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문화와 산업에서 노트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누군가의 노트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일기를 쓰는 행위가 어째서 정신적 만족으로 이어질까? 쓴다는 것은 일상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행위일까? 노트의 물리적 제약이 역설적으로 그것을 무제한적인 디지털 기기보다 유용하게 만들었을까? 노트는 실제로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누가 노트를 발명했을까?
그가 이 질문의 대답을 찾아간 기록도 색색의 노트로 쌓여갔다. 각 노트 안에는 1000여 쪽에 달하는 메모, 수십 권의 책에서 골라 모은 문장들, 수백 명에 이르는 노트 주인들의 목록, 여러 역사와 전기, 회고록 그리고 수많은 학술 논문과 과학 학술지의 내용 요약, 다양한 학자와 관련 인물들과의 인터뷰 등이 담겨 있다. 《쓰는 인간》은 바로 이 질문과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종이에 손으로 쓴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바꿔왔는지를 집대성한 최초의 기록과도 같은 역작이다.
더 먼 곳을 탐험하고, 더 많은 책을 출간하며, 더 많은 상품을 교역하고, 더 많은 서류를 만들어내고, 전반적으로 스스로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든 상황에서 유럽인들은 정보를 감당 가능한 수준의 모듬으로 분류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로서의 기록, 문학과 예술의 단초로서의 기록이 풍부해지면서 문명은 가장 내밀하고 가장 작은 단위에서 서서히 확장되어갔다. 상인의 원장은 고도화된 사업이 발달할 수 있게 해주었고, 치발도네는 토스카나 문학의 인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알붐 아미코룸은 어린 학생들의 우정을 물리적으로 구현했다. 노트는 처음에 사회적·문화적 관계망에서 유래한 다음 그 관계망을 강화한다.
다윈은 아주 작은 노트의 지면에 급히 메모를 휘갈겨 쓰면서 본 것을 관찰하고 따져 묻고 판단했다. 비글호에 승선했을 당시 그는 이러한 무작위한 내용을 거의 2000쪽에 달하는 체계적인 과학적 기록과 기억을 환기하는 상세한 일기로 바꿔놓았다. 그런 뒤 과학사에 혁신을 몰고 온 명저 《종의 기원》의 발상을 다듬어 나갔다. 한 무더기의 현장 노트에서 싹튼 위대한 결과물이다.
채트윈은 작가들이 수백 년간 써왔던 방식과 동일하게 노트를 활용했다. 보카치오처럼 광범위한 독서에 관해 메모하며 지식의 층을 축적했고, 페트라르카처럼 수정과 퇴고 습관을 키웠다. 윌리엄 우스터처럼 풍경의 물리적 실제와 현지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연결했다. 대니얼 디포처럼 노트에 기재된 항목을 활용해 일인칭 서사에 재미를 더했다. 다른 수많은 작가처럼 뜻하지 않은 만남을 포착하고, 인상적인 것들을 기록하며, 현장에서 적절한 표현을 고르도록 스스로 단련하는 데 노트를 사용했다.
1973년 파블로 피카소의 사후에도 여러 습작과 예비 작업, 스케치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한 비평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듯하다”고 발언할 정도였다. 이 노트의 자료들은 그저 한 예술가의 저장 강박 성향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적인 창작과정과 진화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1907년에 그린 No. 42는 〈아비뇽의 여인들〉이 진화한 과정을, 그리고 피카소의 화풍이 구상화의 전통에서 얼마나 멀어지고 있었는지를 드러내 보인다.
버르토크는 친구인 졸탄 코다이와 함께 부다페스트를 떠나 카르파티아산맥의 여러 농토와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농민, 양치기, 돼지치기,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찾아내어 헝가리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노래를 이끌어내어 그 선율을 빨간색 가죽 표지의 음악 노트에 기록했다. 버르토크는 이 원정에서 1000여 곡의 민요 선율을 전사했다. 노트를 16권을 클래식 전통 바깥에 있는 풍성한 음악이 채웠다. 이러한 현장조사와 후속 분석으로 그는 세계 최초의 민족음악학자로 꼽히게 된다.
코폴라 감독은 최종 시나리오보다 자신만의 노트를 참조했다. 그가 영화의 테마를 어떻게 찾아냈고, 대본과 영화를 어떻게 해체하고 구성했는지, 상업적인 소설을 어떻게 〈대부〉라는 걸작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지, 그 자체로 창의적이고 중요한 과정이 담긴 노트다.
내면을 담는 일기는 중대한 역사적 장면과 전환기에 기록으로서 그 가치를 더했다. 세계대전 당시 일기 작가 중 다수는 유대인이었다. 히틀러 집권시 이미 50대였던 빅토어 클렘페러는 유대인 시민으로서 박해받은 13년을 상세히 기록한다. 클렘페러도 그 유대인 시민에 속했다. 그는 이렇듯 점증하는 억압을 13년 동안 상세히 기록했다. 1960년대에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된 그의 일기는 나치 시대에 관한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 묻혔던 다른 수많은 증언이 1981년에야 아우슈비츠에서 발굴되면서,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인종 청소의 현실에 세부 내용과 울림을 더했다.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증언으로 확장된 대표적인 사례다.
“사소한 것에서 탄생한 비범한 가능성”
충분히 사용하라. 그러면 노트가 뇌를 바꿀 것이다
“일기를 써라(keep). 그러면 언젠가는 그것이 당신을 지켜줄(keep) 것이다”라는 영화 대사가 있다. 미래를 계획하면 보다 효율적인 인간이 되듯 삶을 기록하면 정서 상태에 이롭다. 자기 일지 작성은 일종의 마음챙김 역할을 수행한다. 자신의 행동을 그저 관찰하기만 해도 더 나은 행동에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신경학 연구는 종이 노트가 디지털 도구보다 유리한, 특히나 효과적인 학습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강의 내용을 노트북 컴퓨터에 필기하는 학생들은 펜과 종이로 기록하는 학생들만큼 집중하지 못하고 기억력도 저하된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키보드 타이핑이 들리는 대로 받아 적는 데 더 특화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를 기억으로 암호화하고 간추리고 각자의 두뇌와 개성에 맞춰 개념도를 만들 때 진정한 학습과 창조가 이루어진다. 근육을 쓰면 기억을 더욱 잘 암호화할 수 있다. 종이 자체의 촉감과 감각 특질뿐만 아니라 지면 위의 기록이 고정된 위치를 가진다는 점도 영향을 준다. 반면 화면 위의 기록은 스크롤로 넘어가버리거나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요인이 결과적으로 “보다 심층적이고 더욱 탄탄한” 인지 과정으로 이어진다. 애플, 구글, 에버노트 같은 기업이 제품 개발에 수십억을 쏟아부었는데도, 여전히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인지 도구는 수백 년 전에 발명된 셈이다.
필사의 유행과 위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상당량의 문헌을 베껴 쓰는 것과 관련된 노고가, 필사자가 그 글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어떤 시나 편지를 옮겨 적을 때 쓰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단어 선택, 어순의 미세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며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구입한 텍스트로 누릴 수 있었던 것보다 더욱 친밀하고 유의미한 경험”을 향유하게 된다. 텍스트를 베껴 쓰는 의미 있는 노고가, 텍스트를 진정으로 즐기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내 손끝과 종이의 물리성이 결합해 더욱 생생한 경험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