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새벽』의 시인이자 80년대 혁명의 아이콘이었던 박노해. 이제 카메라를 든 '사진가 박노해' 또한 낯설지 않다. 박노해는 지난 15년간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와 오래된 만년필을 들고, 지상의 가장 멀고 높고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어왔다. 이번에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아시아다. 박노해 사진집 『다른 길』에는 지난 3년 간 아시아 전역에서 촬영한 7만여 컷의 사진 중에 엄선한 아시아 6개국의 140여 점의 사진과 글이 실려있다. 인류 정신의 지붕인 땅 티베트에서부터 예전에는 천국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지옥이라 불리는 땅 파키스탄을 거쳐 극단의 두 얼굴을 지닌 인디아까지, 박노해가 찾아간 현장은 거의 공식적인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곳들이다. 박노해는 아시아 토박이 마을 삶 속으로 들어가, 다 다르게 살고 있는 민초들의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삶과 노동, 눈에 띄지도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는 이름없는 이들의 헌신과 고결을 묵묵히 포착해냈다. 필름 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심장의 떨림으로 촬영한 사진들, 그리고 단편소설만큼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읽다 보면 전시장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하다. 유럽의 인쇄를 뛰어넘는 아트프린팅은 이 사진집을 품격 있는 정통 흑백 사진집으로 완성시켰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소장하고 싶은, 묵직하고도 아름다운 책.
지구시대 유랑 시인, 박노해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유랑길은.
한 시대의 끝간 데까지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작가의 글」에서)
그러나 그는 차라리 ‘길 찾는 혁명가’였다. 박노해는 늘 정해진 길보다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노동의 새벽』의 시인으로 80년대 권위주의 시절에 민주투사이자 저항의 상징이었던 박노해는, 사형을 구형 받고 무기수가 되어 7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민주화 이후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다들 예상했던 권력과 정치의 길을 거부하고 묵묵히 스스로 잊혀지는 길을 택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 체제의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지난 15년간 ‘지구시대 유랑자’로 이 지상의 가장 멀고 높고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어왔다.
2003년 전쟁의 이라크에 뛰어들며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 현장의 살아 있는 진실을 글로는 다 전달할 수 없는 절실한 필요 때문에 카메라를 들게 되었다”고 말하는 박노해. 이제 우리에게 ‘사진가 박노해’ 또한 낯설지 않다. 지난 201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나 거기에 그들처럼」 사진전은 아프리카.중동.아시아.중남미에서 촬영해온 107점의 사진을 통해 12년간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한 전시였고, 19일간 1만 1천여 유료 관람객을 기록했다. 박노해 시인이 설립한 비영리 사회단체 ‘나눔문화’가 운영하는 ‘라 카페 갤러리’에서는 2012년부터 그의 글로벌평화활동 사진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누적 관람객이 6만여 명에 이른다. 국내 사진작가로서 유례 없는 관람객 수뿐 아니라, 박노해의 전시는 “가장 긴 시간 머무른 전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전시”, “도록과 작품 판매가 많은 전시” 등으로 불려왔다. 관람객의 내면에 깊은 감동의 파장을 남기는 박노해 사진전을 가리켜, 사진전을 기획한 이기명 한국매그넘에이전트 대표는 “박노해 사진전은 ‘문화적 사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그룹 「매그넘」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는 요제프 쿠델카(Josef Koudelka)는 박노해의 사진집을 받아본 뒤, “박노해 시인에게 나의 경외의 마음을 전해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희망의 종자’를 품은 땅, 아시아에서 길어올린 시대정신
2014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두 번째 전시, 박노해 사진전 「다른 길」展과 함께 출간된 이번 사진집에서는 아시아인들의 삶이 펼쳐진다. 지난 3년간 아시아 전역을 기록한 흑백 필름 사진은 무려 7만여 컷. 3년의 작업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다양하다. 『다른 길』에는 인류 정신의 지붕인 땅 티베트에서부터 예전에는 천국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지옥이라 불리는 파키스탄을 거쳐 극단의 두 얼굴을 지닌 인디아까지, 나아가 버마, 인도네시아, 라오스 등 총 6개국의 엄선된 140여 점의 사진이 실렸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원할 주체로 아시아의 시대를 호명하고 있는 지금, 박노해는 깊은 물음을 던진다. “아시아 시대의 부상은, 단순히 경제권력이 이동하는 문제를 넘어 ‘문명 전환’의 숙제를 우리에게 안겨주는 인류사적 사건이다. 세계 절반이 넘는 거대 인구 공동체가 ‘성장과 진보’라는 서구의 길을 뒤따라간 자리에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 동안 뒤떨어진 듯 여겨져 온 아시아는,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삶의 원형’이자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원할 ‘희망의 종자’가 남겨진 땅이다. 오랫동안 대안 삶의 혁명을 추구하고 실험해온 그는, 아시아 토박이 마을 삶 속으로 들어가 ‘최후의 삶’이자 ‘최초의 인간’인 그이들과 혈육처럼 어울리며 사진을 찍고 그이들의 지혜의 말을 새기며 글을 썼다.
박노해의 사진 속 아시아는 ‘눈물의 땅’ 아시아도 아니며, 신비화된 ‘오리엔탈’의 아시아도 아닌 전혀 새로운 모습이다. 박노해는 슬픔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소생하고 있는 아시아인의 삶을 담아냄으로써, 정직한 절망 끝에 길어올린 ‘희망의 세계관’을 제시한다.
‘일상의 경이’를 담은 성화聖畵
“인간에게는 위대한 일 세 가지가 있다.
사는 것, 사랑하는 것, 죽는 것.”
박노해의 사진은 이 위대한 ‘일상의 경이’를 펼쳐 보이며, 눈에 띄지도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는 이름없는 이들의 헌신과 고결을 묵묵히 포착해낸다. 눈부시게 진보하는 세계와 멀어져 가장 험난한 곳에서,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는 전통마을 토박이들. ‘어찌할 수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어찌할 수 있음’은 최선을 다해가면서,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박노해의 사진 속에서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박노해는 그 내용에 걸맞은 독창적 형식과 미학을 이루어왔는데, 그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역광’과 ‘절제된 빛’이다. 사진에서 빛은 결정적이다. 빛은 새벽, 아침, 정오, 저녁 등 때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사진의 느낌과 내용을 결정한다. 박노해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던 존재들을 역광으로 촬영함으로써 감동을 배가시키고, 주인공의 앞면에 깔린 길고 짙은 그림자는 중후함과 드라마틱한 느낌을 더해준다.
여기 파키스탄의 손수 지은 아담한 흙집에서 가족이 아침을 맞아 전통 차 짜이를 끓이며 언 몸을 녹이는 사진이 있다. 미소를 띤 얼굴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에게 전통 가옥의 천장 구멍 사이로 '햇빛 기둥'이 내려온다. 그 한 줄기의 절제된 빛에 인물들의 실루엣이 신비롭게 강조되고, 어찌 보면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은 신성한 의례로 탄생한다. 그리고 버마의 인레 호수에서 작은 조각배에 몸을 의지한 채 그물을 당겨 고기잡이하는 어부의 사진이 있다. 사선으로 흘러내리는 아침의 역광 아래, 먹고 살기 위한 고기잡이 행위는 돌연 노동의 춤이 되고 장엄한 신성을 느끼게까지 한다. 그렇게 박노해는 가난하고 힘없고 이름 조차 없는 토박이들을 그 자체로, 대지에 뿌리박은 그 흙냄새로, 인간의 존엄과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성화聖畵로 그려내고 있다.
단편 소설만큼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사진 캡션
박노해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 뭉클해지는 것은 거기 내재된 사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촬영 대상을 분석하고 탐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대상과 깊은 애정으로 교감하고 그들 속으로 혈육처럼 스며들어가 어느덧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