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은 왜 호메로스를 공격했는가?
- 삶과 죽음, 영혼과 신을 둘러싼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대결
《철학의 신전》의 저자 황광우가 예견하는 21세기는 ‘동아시아가 세계를 주도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괜찮은’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양 정신’을 아는 일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만 알아서는 서양 정신을 알 수 없고, 기독교만 알아서도 서양 정신을 알 수 없다. 서양의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호메로스를 알아야 한다.
역사학자 핀리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전하는 시대는 기원전 10세기이다. 아직 신화가 본격적으로 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로 분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고대 그리스인의 신관, 인생관, 세계관은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었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가 그린 신과 영웅의 모습을 본받으려 했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세계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의 모습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호메로스의 신은 음모, 싸움, 전쟁, 폭행, 패악, 잔인무도를 일삼았으며, 호메로스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짓말도 도둑질도 불량한 행실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메로스의 시를 암송하며 자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정의란 친구에게 이익을 주고 적에게 해악을 끼치는 기술이었다.
한편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를 통해 자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플라톤이 극복하고자 한 시대의 정신을 만든 이가 바로 호메로스였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드러난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선과 정의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정말로 올바른지 의심한 것이었다. 그 의심의 끝에 등장한 것이 철인정치론이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원전 431년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돌기 시작한 역병 탓으로 아테네에 염세주의와 쾌락주의가 횡행했다고 기록한다. 대중은 그날그날의 이익을 좇을 뿐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치란 한 나라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 집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아테네 민회는 잘못된 결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정치는 철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롱기누스는 플라톤이 마치 젊은 전사가 만인이 경탄하는 경쟁자와 싸우듯 호메로스와 온 마음을 다해 다투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 이론들을 그렇게까지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불화로부터 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황광우는 이 쟁투의 장을 ‘철학의 신전’이라 이름 붙였다. 이 신전에서 벌어지는 대결은 시와 철학의 불화라는 꼴로 표출되었으며 그것은 기실 ‘삶과 죽음, 저승과 영혼, 인간과 신’을 둘러싼 두 세계관의 대결이었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삶의 도덕적 정당성을 신의 존재에서 찾았으나 호메로스가 보기에 신은 처음부터 정의와 무관한 존재였다.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만 인간의 삶에 정의를 세워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또 플라톤의 철학은 영혼의 정화를 지향했으며 그 정화의 수단이 곧 철학이었다. 정화의 최종 목표는 신의 곁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반면 호메로스적 인간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은 불멸의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스테디셀러 “철학 콘서트”의 저자 황광우는 이 대결을 독자들에게 쉬운 언어로 해설해준다.
《철학의 신전》의 1부에서는 시대를 철학한 철학자 플라톤의 사상을 되짚어본다. 플라톤이 민주정치를 회의하고 철인정치를 대안으로 내세우게 된 이유를 밝히고, 그가 말하는 ‘선의 이데아’가 곧 신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시인 추방론’에서 ‘시인’은 바로 호메로스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그리스 정신을 대변하는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을 분석해본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아본 뒤,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고대 그리스인의 영웅관을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세계관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본다. 삶과 죽음, 저승과 영혼, 인간과 신을 둘러싼 두 세계관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정의에 대한 플라톤의 물음을 시대를 초월한 물음으로 보지 않고 플라톤이 살다 간 고대 속에서 제기되었던, 구체적 역사성을 갖는 물음으로 보면 시와 철학의 불화가 더욱 뚜렷한 맥락을 갖게 된다. 호메로스의 신은 일견 부도덕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인간의 합리적 사유와 도덕적 판단을 초월한 존재였다. 하지만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작품이 신성모독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호메로스의 불의한 신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쾌락주의가 만연한 당시에 불변의 도덕률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철학의 신전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플라톤 철학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 철학의 신전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정의롭고도 도덕적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은 21세기를 주도하는 세계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행복한 개인,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상을 마련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철학을 통해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고찰하는 저자의 산책길을 함께 걸어보자.
■ 플라톤의 사상은 철학의 외양을 가진 신학이었다?
- 신에 대한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생각을 통해 읽는 서양 정신의 원류
플라톤 사상의 종교적 성격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됐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지적하는 학자를 만나기 어렵다.
-박홍규, 《플라톤 다시보기》(필맥 2009), 82쪽.
박홍규의 말처럼 《철학의 신전》은 플라톤 사상의 종교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만나기 어려운 책이다. 황광우는 플라톤이 제자들과 주고받았을 그들만의 대화인 ‘에소테리카(esoterika)’와 여러 사람에게 두루 공개하는 이야기인 ‘엑소테리카(exoterika)’라는 개념을 근거로 플라톤의 ‘이데아’가 사실은 ‘신’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플라톤은 그의 엑소테리카라 할 저작 《국가》에서 시인, 곧 ‘호메로스’를 추방하자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호메로스의 시에 등장하는 신들이 도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인간사에 사사건건 끼어들어 방해를 하는가 하면 신답지 못하게도 온갖 패악과 협잡을 저지르곤 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의롭고도 선한 신을 다른 말로 표현한 ‘이데아’라는 개념을 설정한다. 어쩌면 플라톤이 제자들과 에소테리카로 대화할 때에는 이데아가 곧 신임을 드러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호메로스로서는 플라톤에게 공격을 당하는 것이 억울할 일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도덕성과 부도덕성은 인간의 특정 관점에 기준을 둔 규정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신은 그것들을 넘어서 있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메로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플라톤의 공격은 부당하다. 호메로스의 신은 인간의 합리적 사유와 도덕적 판단을 초월한다.
19세기의 철학자 니체는 플라톤에게 공격당하는 호메로스를 변호한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추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신들은 인간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당화했다고 말이다. 니체는 그리스 신들이 인간적인 삶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플라톤을 향한 투쟁의 깃발을 올린다. “이데아를 향한 플라톤의 열광은 종교적 차원의 광기”라며. 마침내 니체는 철학의 자유를 위하여 신을 살해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플라톤의 신이 추악했을 것이다.
신에 대한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견해는 현대에도 유효하다. 그들의 견해를 되짚어보는 일은 곧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설정하는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