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에서 자라난 넝쿨이 온 세상을 뒤덮듯
마음속에서 자라난 온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 때’
내 친구 호수 아이는 정말 괴물일까?
호수 아이의 파란 얼굴, 그보다 더 차가운 사람들의 마음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소년은 숲으로 이어진 작은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가 말했던 파란 괴물 이야기였습니다. “동쪽 숲에는 파란 괴물들이 살고 있단다. 너같이 작은 아이는 한입에 잡아먹힐지도 몰라.” 그러나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새하얀 눈 위로 꾹꾹 찍혀 있는 발자국은 괴물의 발자국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다고요.
소년은 할머니의 말을 뒤로 한 채, 발자국을 따라 숲으로, 숲으로 나아갔습니다.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는 소년처럼 어린 호수 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말이 틀렸던 것입니다. 파란 얼굴의 호수 아이는 괴물이 아니라, 소년처럼 작고 어린 착한 친구였으니까요.
호수 아이와 소년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함께 나무도 오르고, 여름이면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으며,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행복한 추억들을 켜켜이 쌓아 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호수 아이가 소년의 집에 놀러 왔을 때, 소년의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 애는 우리와 달라. 어울려 놀지 마.” 소년의 엄마와 할머니는 소년과는 달리, 겨울눈보다, 호수 아이의 얼굴색보다 더 차가운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동쪽 숲, 호수 마을을 적으로 여겼습니다. 실제로 그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습니다. 단지 얼굴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로 소년처럼 먼저 다가가 본 적도, 먼저 손 내밀어 본 적도 없었으면서 말이지요.
소년은 어쩔 수 없이 호수 아이를 배웅하였고, 호수 아이는 그런 소년에게 씨앗 세 개를 선물로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전쟁의 시작,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세워지다
호수 아이가 숲으로 돌아간 날 밤, 소년은 산 너머에서 너울거리는 붉은 빛을 보았습니다. 쿵 하는 커다란 굉음이 들렸습니다. 마을 어른들이 모두 모여 의논했습니다. 호수 마을에 사는 이들을 의심했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을 주변에 높은 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높고 크게 쌓인 벽 앞에서 더는 호수 아이를 만나러 갈 수 없던 소년은, 호수 아이에게 선물 받았던 씨앗 하나를 그 자리에 심었습니다. 자신의 친구, 호수 아이를 그리워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산 너머에서 일렁이던 불길은 마을을 둘러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자, 소년의 가족은 이 불길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전쟁은 호수 마을에 사는 이들이 먼저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마을 사람들이 호수 마을 사람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았듯, 다른 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터전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흩어진 마을 사람들은 그곳 사람들에게 이방인이었고, 파란 호수 아이였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세 개의 씨앗,
우리의 마음에도 세 개의 씨앗이
소년의 가족이 긴긴 여행 끝에 도착한 도시는 온통 회색빛이었습니다. 마을에 세웠던 벽보다도 더 커다란 건물들이 곳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 역할을 했습니다. 호수 아이처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낯선 말을 하는 낯선 이들로 가득했습니다. 도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웃어 주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함께 마주 보며 웃었던 호수 아이를 그리워하며 두 번째 씨앗을 심었습니다.
소년이 심은 두 번째 씨앗은 시간이 지나 넝쿨이 되어, 도시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회색빛의 도시를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색색의 꽃들이 피어났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세워졌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꽃과 같은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가 초록빛으로 물드는 동안, 소년도 자라고 또 자랐습니다. 귀여운 소녀의 아빠가 되고, 또 귀여운 소년의 할아버지가 되었지요.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자신이 살던 숲 마을을 다시 찾았습니다. 어른들이 세웠던 장벽이 씨앗으로 인해 초록빛의 넝쿨에 무너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씨앗 역시 견고해 보이기만 하던 장벽을 무너뜨렸던 것이지요.
호수 아이와 어울려 놀던 숲속 호수에도 가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마지막 세 번째 씨앗을 꺼내 호수 위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느꼈습니다. 세 번째 씨앗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을요.
과연 소년은 그 순간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된 걸까요?
호수로 띄워 보낸 씨앗은 어디로 흘러갔던 것일까요?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는 호수 아이가 선물한 씨앗들이 숨어 있습니다. 차가운 시선과 편견, 낯선 것들을 무너뜨리는 초록빛 넝쿨로 자라날 씨앗들이지요. 바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 함께하는 삶, 희망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날 씨앗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