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석 최정환 이덕인 박흥수
정태수 최옥란 박기연 우동민……
한평생 ‘변방의 존재’로 머물다 간 이들,
그죽음의 순간조차 불평등했던 이들,
그러나 그 불평등마저 저항으로 벼려낸 이들
장애해방열사가 산 자들의 ‘이 세계’에 남긴 것
한 장의 유서가 촉발한 저항: 김순석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
장애자들은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대우를 받아도 끝내는 이용당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니다.”
—《조선일보》(1984. 9. 22)에 실린 김순석의 유서
1984년,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 앞으로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순석(1952~1984. 9. 19). 김순석의 죽음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라는 인식이 대두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항거로 평가받는다. 어려서 겪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던 그는 1980년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심한 장애를 입게 되었다. 그래도 세공 기술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액세서리를 만들고 팔며 꿋꿋이 생계를 이어갔고,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번번이 도로의 턱에 가로막혀 운신조차 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삶을 꾹꾹 눌러 담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1984년 9월 22일의 일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친목 위주의 단체였던 대학정립단 소속 학생들(주로 소아마비장애인들)을 행동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그가 생을 마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0월 6일 장애인 복지시설 정립회관 운동장에서 열린 제8회 전국지체부자유 학생체전 개회식에 김순석의 모조관을 들이고 그의 사정이 적힌 유인물을 배포했다. 장애인을 위하는 척하는 겉치레용 행사만 열지 말고, 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당시 이 행사에는 문교부 장관, 서울시 교육감, 국회의원, 보건사회부 사회국장 등이 내빈으로 참석해 있었다.
김순석 열사의 유령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출몰한다.
시작이 된 죽음: 최정환, 이덕인
“복수해달라,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
—최정환
장애인의 자립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1980년대, 장애인이 노동을 통해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노점이 유일했다. 기술을 익히기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와 양말, 라이터, 휴지, 껌 등 간단한 공산품들을 팔아 하루 먹고살 만큼의 수입을 거두곤 했다. 스물한 살 때 당한 교통사고로 하반신마비를 입은 최정환(1958. 6. 30~1995. 3. 21)도 그중 하나였다. 수세미를 팔다 카세트 노점으로 종목을 바꾼 그는 양재역 부근에서 쏠쏠한 수입을 얻으며 호시절을 맞는다.
그러나 정부의 노점상 탄압은 그를 사지로 내몬다. 1994년 여름 단속을 당하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그는 생계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그에게 서초구청 측은 ‘고소하지 않으면 이제 편하게 장사하도록 해주겠다’며 합의를 종용했지만, 끝내 그 약속을 저버렸다. 1995년 3월 8일, 단속반원들에게 장사 밑천인 스피커와 배터리를 또다시 빼앗긴 그는 그 물건들을 되찾고자 찾아간 구청에서 멸시 어린 시선을 받고 쫓겨난다. 그날 저녁 최정환은 시너 1리터를 자신의 몸에 쏟아붓고 불을 붙인다. 온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21일 새벽 끝내 숨을 거둔다. 최정환의 죽음은 “복수해달라,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계획대로라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영결식을 하고, 서울시청과 서초구청에서 노제를 한 후에 용인에 위치한 천주교 공원묘역으로 향해야 했지만, 그마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가면서 어그러진다. 최정환 시신이 경찰 손에 넘어갔던 배경에는 당시 장례투쟁에 함께했던 일부 장애인단체의 ‘배신’이 있었다. 3월 25일, 결국 시신 없이 영결식이 치러진다. 경찰은 영결식을 마치고 가두 진출을 시도하는 이들을 곤봉으로 내리쳤고, 현장은 순식간에 수백 개의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지뢰밭이 되었다. 연대 앞, 서울시청 삼거리, 강남시립병원 앞에서 사람들은 최정환이 부탁한 ‘복수’를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그렇게 열사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냈다.
최정환 열사 투쟁이 있은 지 수개월 만인 11월 28일에는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1967. 12. 14 ~ 1995. 11. 28)이 아암도 망루투쟁 중 의문사하는 일이 발생한다. 경찰의 눈을 피해 망루 밑으로 내려가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사흘 뒤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고 했고, 시민들은 이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끝내 시신을 탈취해 자신들 마음대로 부검을 진행하고는 사인 역시 ‘익사’로 일방 처리해버린다. 1996년 4월 24일, 이덕인의 장례는 결국 그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지 못한 채 치러졌고, 2021년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규명 없이 ‘의문사’로 계류 중이다.
‘변방’이 세계와 접할 때: 박흥수, 정태수
“유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듣는 자’가 있을 때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말’로 남는다. 최정환의 유언을 읽어낸 사람들은 필사적이었다. 이 죽음은 박흥수, 정태수를 조직했다.”(61)
박흥수(1958. 5. 15~2001. 7. 23)는 장애인 노점 확보를 혁명의 한 과정으로 생각한 이였다. 1995년 청계천 노상에서 한동안 씨티폰 등을 팔았던 그는 자기 장사보다 다른 노점들 확보투쟁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가 당시 이 투쟁에 제 모든 것을 건 것처럼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본에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장애인들이 그 지배 시스템 안으로 어떻게든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 그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사실상 무임금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던 운동가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비루한 자들의 혁명은 환영받지 못했다.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이름표를 달고 출범한 정권 5년 동안에만 3만 5039개의 노점상이 강제로 철거당하고, 5662개의 손수레가 파괴될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용역을 대동한 단속반이 수시로 들이닥쳐 좌판은 엉망이 되었고, 폭력과, 욕설, 고성이 난무했다. “박흥수는 언제나 이 싸움의 선봉에 서 있었다. 딱히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선동가도 아니었고, 정제된 사상으로 무장된 이론가도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곁에 선 동지들을 전선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꽤 오랜 시간 동료들과 투쟁을 연습해왔던 박흥수는 준비된 운동가였다. 그 시작은 1989년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과정 동문회 ‘싹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박경석(현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정태수와 함께 팔뚝질과 구호 제창을 연습하며 양대 법안(장애인고용촉진법·장애인복지법) 제·개정 촉진을 외치는 투쟁 현장에 나갈 채비를 했다. 데모를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운동권 대학생들에 뒤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싹틈이 운동의 역량을 다질 수 있었던 데는 박흥수의 역할이 컸다. 1989년 봄 박흥수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을 익혀도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취업하더라도 저임금과 차별에 시달리는 직업훈련과정 학생들의 현실에 대해 복지관 측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 그 과정에서 복지관 측과 마찰이 일자 그는 학생 23명을 조직해 복지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한다. 5일간 지속된 농성 끝에 복지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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