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청개구리를 빈 유리병에 담아 어찌어찌 공릉천 방향으로 차를 몰고는 있었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 옆자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잔디가 개구리가 담긴 딸기잼 병을 두 손으로 너무나도 소중히 쥐고 있었다. 자기도 어디가 어딘지 몰라 불안했는지 연신 창밖 여기저기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청개구리에게 조용히 말을 거는 게 아닌가? 개구리야, 우리가 꼭 좋은 자리 찾아줄게, 조금만 참아.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말을 보태고 말았다. 어어 그래야지, 데려다주고말고! _「멸종위기종 1급 수원청개구리가 맞았을까?」 중에서
거대한 재단판 위에 수백 겹의 천을 쌓는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을 지켜보면서 아빠가 가진 쓸쓸함과 외로움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재단판 한쪽 끝에 서서 반대쪽으로 넓은 천을 던지고 긴 자로 천 위를 가만히 쓸어 평평하게 만드는 일. 깔린 천과 새로 덮이는 천 사이로 공기가 빠져나가며 들썩이는 모양이 꼭 파도 같아서 아빠의 일은 감정과 육체를 함께 쓰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_「아빠는 취해서도 내 텐트였다」 부분
출판사 난다에서 새로운 시리즈 방방곡꼭을 론칭합니다. 방방곡곡. 발음 [방방곡꼭]. “방방(坊坊) 뛰고 곡곡(曲曲) 걸으며 꼭꼭(‧ ‧) 눌러쓴 난다의 우리 도시 이야기.”(시인 오은) 그 두번째로 찾아간 도시는 “너른 길과 낮은 건물들이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는”(11쪽) 경기도 파주입니다. 시인 김상혁, 김잔디 두 저자가 ‘파주’라는 한 지역에 함께 살며 사랑하며 각자 써내려간 기록을 한데 모았습니다. 파주의 아름다운 길 이름을 중심으로 원고를 분류했고 사슴벌레로부터 안개초길까지 서른 개의 길과 동네를 골라 에피소드를 펼칩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기념으로 책을 내자고 한 때로부터 흐른 팔 년이라는 시간이 원고를 차곡차곡 물들이고 있습니다. 김잔디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말합니다. 다행인 건 우리가 파주에 산다는 것이라고요. 다른 곳보다 차게 부는 바람과 늦게 피는 꽃, 더 높거나 깊어 보이는 눈송이들이 너무 가벼워지려는 생각들을 지그시 눌러준다는 걸 이제는 안다고요.
시인 김상혁은 묻습니다. 파주의 무엇이 그토록 매혹적이었을까? 유독 청량한 대기, 빼어난 경관 그리고 눈에 띄게 여유롭고 선량한 이웃들…… 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는데, 어쩌면 좋은 시집을 골라 읽을 때처럼 아름다운 파주를 주장했던 건 아닐까? 하고요. 그의 화법은 보통의 것과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에 넘치게 행복해서 되레 현실감이 없었고 행운처럼 주어진 이 좋은 환경이 영 내 것 같지 않은” 감각(50쪽). ‘좋은 아빠, 잘해주는 남편’이라는 유의 칭찬에 그런 사람 아니라는 정황을 기어이 찾아서 내놓아야 하는 억하심정(194쪽). 어린 시절 목표는 “민폐 끼치지 않는 아이가 되는 것”(198쪽)이었던 그는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 문채를 통해 가늠하기도 어려운 사십오억 년이라는 지구의 나이를 상상해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기나긴 선 위에다 ‘우리 가족’이 함께할 시간을 하나의 티끌처럼 올려두는 상상에 이르면 세상의 모든 사랑과 수고가 멍청한 농담 같아진다고요. 그러나 시간은 기나긴 선이 아닐지도요, 우리가 나누는 농담의 질감은 어쩌면 프롤로그에서의 아내 김잔디의 말처럼 이곳 파주가 지구의 전부 같다고 여기게 해주었던 어느 겨울, 자유로를 달리는 동안, 갈라진 얼음덩이 위에서 진흙처럼 녹아가는 눈의 두께 같은 것일지도요. 이들 부부에게 파주는 그렇게 ‘평범’하지만 아름답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일상에 최선을 다하며 점점이 다른 무늬를 얻어가는 “새로운 세계”(11쪽)입니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언제로 가고 싶으세요?라는 유진목 시인의 질문에 그러다 지금 내 아이가 안 태어나면 어떡해요, 저 죽어요, 하는 마음에 닿기까지(135쪽) 이들은 얼마나 많은 겹겹의 파도를 쓸어 평평하게 만들었을까요. ‘사소한 걸 아무리 이겨도 큰 싸움에서 진 것 같은’(129쪽) 우리의 삶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건 이렇듯 용케도 한 방향으로 걸어보는 일 아니겠는지요. 본문에서는 두 사람의 원고를 구분하고자 두 사람의 팬톤 별색(김상혁 2707U, 김잔디 7401U)을 각기 지정했습니다. 본문에서 총 서른 번 만나게 되는 속표지의 색은 이 두 사람의 색을 하나로 합했을 때의 빛깔로, 누구에게나 인사를 잘하는 따뜻할 문(炆), 채색 채(彩), 여덟 살 문채의 색깔이기도 합니다. “안녕? 나는 김문채야. 나는 지구에서 왔어.”(10쪽) 이 기쁜 인사에 안녕? 하고 웃어줄 당신을 기다립니다. 문채네 가족이 살아가는 파주에 어서 오세요.
며칠 전이었다. 아내가 아이를 재우는데 둘 있는 옆방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문채가 어른 되는 일이 무섭고 싫다고 말하는 모양이었다. 문채, 사실은 아빠 좋지? 응, 멋지고 착하다고 생각해(나랑 놀 때는 아빠가 제일 싫다고 말한다). 그럼 너도 아빠 같은 어른 되면 되겠네? 아니야, 아빠 같은 어른은 힘들 것 같아. 아빠는 너무 멋지고 너무 착하거든. 나한테 너무 잘해주거든. _「아빠 같은 어른은 힘들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