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모험담 『모비 딕』으로 19세기 근대적 이상을 비판한 미국의 대표 작가 허먼 멜빌
월가의 기이한 사건 「필경사 바틀비」, 멋쟁이 선원 이야기 「선원 빌리 버드」 수록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 어릴 적에는 에드거 앨런 포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때 읽지 않았던 허먼 멜빌을 사랑한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더불어 멜빌은 세계가 두려워하는 작가이다. ─ D. H.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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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징과 알레고리로 존재의 심연 드러내는 위대한 작가 허먼 멜빌
멜빌 세계관의 정수를 드러내는 후기 단편 소설 두 작품 엄선
19세기 미국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장편 소설 『모비 딕』을 쓴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집 『필경사 바틀비·선원 빌리 버드』가 세계문학전집 450번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에 엄선한 멜빌의 단편 소설은 기원이 없는 순수한 인간 바틀비를 통해 근대적 이상 세계를 비판한 「필경사 바틀비」(1853)와 순수한 선원 빌리 버드를 통해 계몽주의적 이념을 비판한 「선원 빌리 버드」(1924)이다. 멜빌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 해양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19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대중적 관심사를 반영한 해양 모험담 『타이피』(1846)와 『오무』(1847)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멜빌이 심혈을 기울여 1851년에 발표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며 신화적 주제를 천착한 장편 소설 『모비 딕』은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멜빌의 새로운 예술적 열망에 영감을 준 것은 너새니얼 호손과의 교류였다.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 경향이 강한 호손의 영향으로 멜빌은 신기한 풍물과 모험 이야기를 버무려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대신 독창적이고 새로운 자기 세계를 구축하였고, 이를 단편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멜빌은 익명으로 2회에 걸쳐 《월간 퍼트넘》에 「필경사 바틀비」를 발표했고, 1924년 유고작 『빌리 버드』가 출간되면서 그의 문학성은 다시 주목받는다. 이후 20세기 중반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멜빌은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가로 자리매김했다.
월 스트리트에 사무실을 둔 변호사인 화자는 ‘바틀비’라는 청년을 필경사로 채용한다. 어느 날 ‘나’는 필사한 서류를 검토하자고 바틀비를 호명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한다.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바틀비는 필사 외의 모든 업무를 이 말로 거절하더니 필사를 거부하고, 사무실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고,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하고, 급기야 먹기마저 거부하는데…….(「필경사 바틀비」)
그레이블링 선장이 이끄는 ‘인간의 권리’호 선원인 빌리 버드는 정세가 급박하여 영불해협에서 출항 중이던 영국 해군 전함 벨리포텐트함에 강제로 징집된다. 그리스 조각 같은 외모에 고귀한 영혼을 지닌 빌리 버드는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단 한 사람, 클래거트 선임 부사관은 날것 그대로인 이 ‘멋쟁이 선원’에게 적개심을 느끼는 동시에 매료된다. 어느 날 클래거트는 비어 함장을 찾아가 빌리 버드를 모함하는데, 빌리 버드의 운명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선원 빌리 버드」)
■ 기원이 없는 인간 바틀비를 통해 인본주의적 한계 드러내는 「필경사 바틀비」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필경사 바틀비」는 단편에 불과하지만 간단하지 않다. 줄거리야 지극히 간단하지만 왜 그런 식으로 줄거리가 흘러가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 바틀비는 그런 선택을 하는가, 왜 화자는 그런 선택을 하는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줄거리가 이렇게 흘러가는가’라는 질문이 ‘왜 바틀비는 그런 선택을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면, 다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은 ‘바틀비는 과연 어떤 인간인가.’이다. 이 최종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설명은 대개 바틀비를 ‘소외된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소외론’이 주로 주목하는 내용은 벽에 갇혀 벽만 바라보는 인간, 남이 써놓은 글을 그대로 복사하는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인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용주가 일방적으로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임금 노동자, 저항으로 아무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간,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인 편지를 불태우는 일을 오래 했던 인간, 결정적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고립감에 대한 화자의 마지막 탄식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등이다.
바틀비는 기원과 관련이 있는 존재이다. 필사의 기원은 서구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말씀’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신성한 노동이며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바틀비나 터키와 니퍼가 하는 필사의 원본은 화폐 단위의 이동과 관련된 계약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교환 가치의 순수한 표현으로서의 화폐는 애초 권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전의 권위와 그와 관련된 후광을 잃어버린 작업이 화자의 사무실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본질, 소외된 노동이라 볼 수 있다. 바틀비의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not to.)”는 절대적인 발언이다. 나에게 제안된 행위가 그 무엇이건, 그 어떤 가정에서 추론된 것이건, 어떤 전례에 기초한, 어떤 상례에 맞는 것이건 상관없이 거부하겠다는 보편적인 부정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화자의 문제 해결 능력이 바틀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바틀비에 관한 한 화자의 개입은 언제나 실패한다. 바틀비는 언제나 상궤를, 가정을, 전례를, 일상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틀비를 인본주의 관점에서 희생자로 규정하는 것은 화자가 이 줄거리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범하는 해석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일 수 있다.
바틀비의 이런 절대적 부정을 ‘자유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소외를 극복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 소외를 초래하는 억압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틀비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가. 바틀비에게 원래 돌아갈 그 무엇이 있는가. 바틀비에게는 아무 내용이 없다. 기원도 없으며, 경과도 없고, 흔적도 없다. 바틀비는 ‘유령’이며, ‘죽음’이며, 텅 빈 구멍이다. 바틀비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으며, 기원이면서, 목적지이며, 효과이지 존재가 아니다. 바틀비를 상궤와 연결시켜 그 부정성을 ‘해결’ 또는 ‘상쇄’해 보려는 화자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바틀비를 ‘개인’으로 규정하기를 포기할 때 일반적인 소외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화자는 그를 구원하려 했으나 그 상처가 너무 깊어서 실패한 자가 된다. 화자는 다른 고통받는 인간에게 우편환을 보내고, 사면장을 보내고, 갖은 구명조끼를 다 던져 보았으나 그 모두가 배송 불능의 편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화자의 절규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는 따라서 바틀비의 존재 또는 죽음을 자신의 인간성을 강화하려는 핑계의 최종 결정판이 된다.
■ 순수한 인간 빌리 버드를 통해 법을 넘어서는 숭고함 그린 「선원 빌리 버드」
“비어 함장님께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1924년에 출판된 『빌리 버드』는 멜빌을 재평가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모비 딕』과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로서 오늘날의 멜빌을 있게 한 일등 공신인 셈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소설 「선원 빌리 버드」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클래거트와 빌리 버드는 왜 갈등을 일으키는가. 둘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