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출판사의 사진집 《노탄(NŌTAN)》,
미국 RIT 희귀본 컬렉션(Rare Book Collection) 영구 소장
2025년 6월, 한국의 독립출판사 안목출판사에서 2024년에 출간한 필립 퍼키스(Philip Perkis)의 사진집 《노탄 NŌTAN》이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교(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 이하 RIT) 도서관의 Cary Graphic Arts Collection 희귀본 컬렉션에 영구 소장되었다. 사진 교육과 북아트, 인쇄문화 연구의 세계적 기관인 RIT가 퍼키스의 사진집을 ‘예술과 출판의 귀중한 증거’로 인정한 것이다.
사라져가는 빛 속에서 바라보기의 신비를 포기하지 않은 사진가
1935년생 필립 퍼키스는 75년간 사진가로 살아왔다. 그는 2007년 한쪽 눈을 실명한 후, 2021년 말 양안 시력의 악화로 인해 암실 작업 중단을 선언하고 사실상 사진 활동을 멈췄다. 그러나 그의 책을 오랫동안 출판해온 제자 박태희(안목출판사 대표)는 “사진은 멈추었지만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터뷰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어린 시절 기억, 군 복무 시절의 경험부터 사진 교육, 사진의 의미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질문지로 정리해 보내고, 매주 전화 통화를 통해 퍼키스의 답변을 녹음했다. 그의 아내이자 예술가인 시릴라 모젠터는 녹취록을 소리 내어 읽어주며, 책에 실릴 내용의 편집을 도왔다. 이 협업의 편집 과정을 거쳐 《노탄NŌTAN》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작업은 '더 이상 볼 수 없기 전까지 보는 일'에 집중한 예술가의 시선, 장소, 시간에 대한 절실하며 내밀한 기록이다. 주로 그의 집과 인근 공원에서 촬영된 이 마지막 이미지들은 극적인 장면은 아니지만, 남아 있는 것을 보려는 의지와 ‘지각’ 그 자체에 대한 고요하지만 단호한 선언으로서, 정적 속에 남겨진 이정표처럼 다가온다.
《노탄》,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계의 음영
2019년 말부터, 시력을 완전히 잃을 것을 예감한 퍼키스는 매일 한 장의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더 이상 라이카의 숫자를 읽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소형 자동카메라를 사용했다. 당초 1년을 예상했던 이 프로젝트는 1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67장의 마지막 사진 중 33장이 《노탄 NŌTAN》에 수록되었다.
노탄(NŌTAN)이란 무엇인가?
《노탄 NŌTAN》이라는 제목은 음과 양, 밝음과 어두움의 균형을 중시한 일본의 디자인 개념에서 유래한다. 이 개념에서는 전경도 배경도 우위에 서지 않으며, 둘 사이의 조화가 핵심이다. 퍼키스에게 이 개념은 오랫동안 그가 관심을 가져온 재현과 추상, 즉 ‘무엇’을 담느냐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사이의 긴장과 맞닿아 있다. 그는 또한 교토의 갈퀴 무늬 정원을 예로 들며, 어떤 요소 하나라도 지나치게 강조되면 정원 전체가 실패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퍼키스는 세상을 위계가 아닌 대상과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했고,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사진 작업뿐 아니라 삶의 방식에도 깊게 배어 있다.
세 개의 장 — ⟪서문⟫, ⟪대화⟫, ⟪사진과 이야기들⟫
《노탄 NŌTAN》은 다음의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서문: 퍼키스가 ‘노탄’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이 책을 이끌어가는 철학적·시각적 사유를 밝힌다.
대화: 매주 진행된 인터뷰에서 발췌한 이야기들이 비선형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마치 지나가는 창밖으로 잠시 스치는 먼 풍경처럼, 이 단편들은 자유롭게 사유를 자극하며 조용한 몰입을 독자에게 요청한다.
사진과 이야기들: 총 33장의 사진 사이에 5편의 짧은 글이 섞여 있다. 이 이야기들 역시 사진과 마찬가지로 기억과 관찰, 그리고 삶과 예술이 뒤섞이는 지점을 중심으로 무의식적 흐름을 따라 펼쳐진다.
삶과 작업의 경계 없는 연결
책의 중심에는 ‘작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자리한다. 그는 두 눈이 완전히 볼 수 없을 때까지 촬영과 인화를 지속하며 “예술이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자 그것을 견디는 방식”임을 사진으로 증명한다. 독자는 사진과 그 사이에 배치된 짧은 이야기들에서 삶의 유머와 고통, 기억과 사라짐이 고요히 교차하는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그의 사진집 《노탄》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예술이 삶을 어떻게 관통하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삶을 바라보는 기술로서의 예술”이라는 표현이 이 책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절할 것이다.
RIT의 Cary Graphic Arts 희귀본컬렉션의 영구소장 의의
미국 로체스터 공과대학교(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 RIT)의 케리 그래픽 아트 컬렉션(Cary Graphic Arts Collection)은 전 세계적으로 타이포그래피와 인쇄, 시각예술책의 역사 보존을 선도하는 기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 RIT가 한국의 안목출판사에서 출간한 필립 퍼키스의 사진집 《노탄(NŌTAN)》을 희귀본으로 영구 소장함으로써, 단순히 한 예술가의 마지막 작업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시력 상실 직전까지 이어진 사진 작업, 몸이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예술을 붙든 필립 퍼키스의 삶을 그의 목소리로 기록한 행위, 그것을 엮고 만든 작가와 출판사의 편집적·철학적 기여 이 모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데 의의가 있다. RIT의 이번 소장은 동시대 사진책이 추구할 수 있는 깊이와 가능성을 전 세계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새롭게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1만1천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스승과 제자. 그것은 지구 반대편까지의 거리가 아니라, 대화 의 깊이다." _박미경 (갤러리스트, 작가)
“그가 포착하는 선율은 점점 무조에 가까워지고 템포는 점점 느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그가 노년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육체와 영혼의 활력이 줄어들어 관조하는 자의 시선으로, 보다 정 적인 세계로 옮겨 갔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변화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떨림을 찾아 빈 공간을 떠도는 순례자이므로 그 틈새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 넓은 광야는 더 많은 정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 걸어가고 있다.”_최원호 ([혼자가 되는 책들] 저자)
“노탄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필립의 자유로움이었다. 태희는 '뼈만 남은 것 같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워 마지 않는 그런 자유 아닌가." _빈센트 만지 (사진가)
“퍼키스의 사유는 생생한 이야기와 자전적 정보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방식과 어우러져, 사진가들의 책에서는 드물게 느껴지는 인간미를 이끌어낸다. 무엇보다도, 시력을 잃은 상황에서 찍힌 사진들과 그 사진들에 대해 필립이 들려주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설명은, 창작의 삶을 쉽게 끝내버릴 수도 있었던 강력한 외적 조건들 앞에서도 작업을 지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동적으로 일깨운다. 연속성이나 논리적 전개를 의도하지 않은 편집 방식 또한, 오히려 더 자유롭고 솔직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독자를 무장 해제시키고 깊은 울림을 남긴다.” _ 미국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