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샤비로와 『기준 없이』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1954~)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로, 1981년에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웨인 주립대학교 영어학과 드로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관심사는 영화 이론, 시간, 미학, 과학소설, 범심론, 자본주의, 정동, 주체성 등이다. 샤비로는 2021년에 『사물들의 우주』, 그리고 2022년에 『탈인지』의 한국어판이 갈무리 출판사에서 출간됨으로써 현대철학의 새로운 흐름인 ‘사변적 실재론’의 저자 중 한 명으로 한국 사회에 이미 소개된 바 있다.
『기준 없이』(영어판 2009년 출간)도 사변적 실재론과 관련이 있을까?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사변적 실재론을 직접 논증하기 위해 저술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후속 저작인 『사물들의 우주』(영어판 2014년 출간)와 『탈인지』(영어판 2016년 출간)에서 샤비로가 전개하는 사변적 실재론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형이상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샤비로는 『기준 없이』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섬세한 해석을 전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변적 실재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주로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맺는 철학적 연대성을 해명할 뿐 아니라, 나아가 양자의 철학이 칸트의 세 가지 비판(특히 『판단력비판』)과 맺는 관계를 미학/감성론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아름다움은 진리보다 더 광범하고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
샤비로가 보여주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해석은 넓게 보아 그레이엄 하먼이나 데넷 및 베넷과 같은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입장과 공유하는 몇 가지 철학적 주제와 입장에 대한 기초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아름다움은 진리보다 더 광범하고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라는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격언에 대한 샤비로의 강조와 해석은 그레이엄 하먼 같은 철학자가 주창하는 제1철학으로서의 미학이라는 입장과 공명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샤비로는 “모든 진정한 실재론은 사변적이어야 한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실재와 마주할 때 우리는 사변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사물들의 우주』, 130쪽).
그런데 이러한 사변적 실재론의 성립 조건은 정확히 사물 자체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한 칸트의 입장, 즉 우리가 자신의 사고에서 벗어나 생각하거나 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개념 밖에서 사물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샤비로는 그레이엄 하먼과 화이트헤드가 상관주의의 순환에서 벗어나 전-비판적 또는 전-칸트적인 독단주의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전-비판적 자유를 실현하는 길을 모색했다고 평가한다. 그러한 사변적 실재론의 길은 긍정적인 존재론적 테제와 긍정적인 인식론적 테제를 함께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특히 화이트헤드는 그 길을 인식론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미학에 단적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샤비로가 볼 때 미학은 내재적이고 비인지적인 접촉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식에 선행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지식으로 이끄는 유혹적 측면조차도 갖는다는 것이다.
샤비로는 『판단력비판』의 전반부, 특히 미학에 관한 칸트의 논의에서 칸트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며, 칸트 자신의 체계 구축법에서는 배제된 사변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칸트는 미적 판단을 단지 지성의 필연적 작동에서 벗어난 예외로 간주하는 것 같지만, 실제 칸트의 정식은 이 이상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준 없이』에서 샤비로는 칸트,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가 사변적 미학의 구성을 위한 맹아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적 맥락에서 샤비로는 메이야수의 극단적 우연성과 하먼의 불변하는 진공 속에 갇힌 객체의 대안으로서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미학을 제안한다(『사물들의 우주』, 279쪽). 샤비로가 해석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현실적 계기들의 경험은 실제로 그 근본에서 미적이며, 그렇게 미적인 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 속에서 행위를 하며, 세계와 세계 속 다른 사물들을 사고의 단순한 상관항으로 환원함이 없이 그들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샤비로는 『기준 없이』를 하나의 실험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바로 하이데거 대신 화이트헤드로 몸을 돌려 귀를 기울이는 관점에서 탈근대 이론을, 특히 미학 이론을 다시 사유하려는 시도이다.
하이데거 대신 화이트헤드였다면
스티븐 샤비로는 만일 화이트헤드가 탈근대적 사유의 영감의 원천이었던 하이데거의 자리를 대신했다면 지금 우리의 지적 풍경은 아주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샤비로는 만일 그랬다면 우리가 지금 과도하게 사로잡혀있는 일부 문제들은 덜 중요한 것이 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다른 질문과 전망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구체적으로 샤비로는 『기준 없이』의 「서문」에서 여러 주제를 통해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를 비교하면서 20세기의 이 두 사상가가 비록 반본질주의적이고 반실증주의적인 새로운 사유의 길, 철학의 새로운 방식, ‘경이’라는 철학의 능력을 발휘할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사용하는 개념과 방법, 정서와 정신에서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철학의 여러 문제들(철학에서의 시작의 문제, 철학사에 대한 물음,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 언어에 대한 태도, 글쓰기 스타일, 과학 기술에 대한 입장, 재현에 관한 물음, 주체성에 관한 물음)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된다고 본다. 이 책의 서두에서 샤비로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화이트헤드가 하이데거보다 우월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결국 “만일 하이데거 대신 화이트헤드였다면”, 철학에 대한 ‘구축론적 접근’이 하이데거와 그의 후계자들의 입장을 특징짓는 끊임없는 해체의 과업들보다 우선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독단적인 언명이 아닌 끊임없이 개정에 열려 있는 사변과 구성 및 발명이 미덕이 되는 지적인 풍토가 정착되었을 것이라고 샤비로는 예상한다. 한마디로 샤비로가 이런 가정을 시도하는 이유, 그런 가정이 필요한 이유는 여러 문제에 관한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이데거가 아닌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해체가 아니라 구축, 즉 구성이 철학의 진정한 과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기준 없이’의 의미
샤비로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잘 설명해 준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동일하게 미학을 자신들의 철학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는 방식이 현대 서구 사상에서 미학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판단력비판』의 임마누엘 칸트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미학을 인식론(『순수이성비판』의 주제)과 윤리학(『실천이성비판』의 주제) 모두에 종속시키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학을 예외들의 영역, 즉 경험적 지성 및 도덕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경우들의 영역으로 개방하고 있다.
샤비로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모두 칸트의 미학적 예외주의를 급진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미감적 판단에 관한 칸트의 설명을 아마도 칸트가 알았다면 놀랐을 법한 급진적인 지점으로까지 밀어붙이면서도 여전히 칸트 자신의 공식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은 그가 현실적 계기들(actual occasions)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되고, 들뢰즈의 존재에 관한 설명은 그가 독특성들(singularities)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칸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지성의 기초적 개념들에 대한 미학적 예외들, 도덕법칙의 명령들에 대한 미학적 예외들로 간주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그러한 미학적 사례들이 지성의 개념들이나 도덕법칙의 명령들에 대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미학적 사례들이 기존의 규범들(즉 ‘기준’)로부터 벗어나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