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5‧18민주화운동, 한국 사회를 뒤바꾼 열흘간의 드라마 왜 우리는 지금, 다시 5‧18을 말해야 하는가? 5‧18이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5‧18이 ‘너와 나의 5‧18’, ‘우리 모두의 5‧18’로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지금, 다시 5.18을 말해야 하는가 :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 극우 세력은 4월혁명, 6월항쟁 등 여타의 민주화운동보다 유독 5.18에 대해서만 진실을 왜곡‧폄훼하는 것일까? 5.18이 일어난 지 39년째가 되어가는데도 왜 그들은 망언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의 필자들은 단호히 말한다. 그들이 그토록 5.18을 왜곡하는 이유는 아직도 5.18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다시 5.18을 말해야 하고, ‘너와 나의 5.18’, ‘우리 모두의 5.18’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또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 국가폭력이 계속되는 한 5.18은 결코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은 5.18기념재단이 2016년부터 준비해 만든 일반인과 대학생을 위한 교양서이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목숨을 바쳐 부당한 권력과 싸우며 한국 사회에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필자들은 그 질문들이 무엇이며,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5.18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진실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5.18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그 정신이 인권과 평화의 인류 보편적 가치로 승화, 발전되고 있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왜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지도 파헤친다. 이 책은 4부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에서는 5.18 이전의 역사와 배경, 5.18의 전개 과정, 5.18 이후 6월항쟁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2부 에서는 5.18이 남긴 상처와 그 치유의 문제, 5.18 진실의 왜곡과 조작, 5.18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서술했다. 3부 <해석과 실천>에서는 5.18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그리고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에서의 변혁운동을 5.18과 비교했다. 더불어 5.18의 주체인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 윤리, 5.18 공동체의 특징과 의미도 살펴보았다. 4부 <기억, 증언, 예술>에서는 5.18이 문화예술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를 서술했다. “5‧18은 민중이 생명을 바쳐 쓴 서사시이다. 그 주제는 ‘국가와 인간’이다. 5월 민중은 목숨을 바쳐 부당한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그 질문들이 무엇이며 지금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임을 말하려 했다. 5.18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민중이 겪은 역사적 고통과 좌절, 그리고 극복에 대한 기록이다. 국가의 모습이 5월 민중이 목숨을 바쳐 이룩한 생명공동체의 빛나는 성취와 일치하지 않는 한, 5.18은 계속되는 현재이다.” 5.18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 평범한 사람들이 일으킨 항쟁 5.18은 왜,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을까? 1979년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18년 만이었다. 그리고 곧 전두환을 비롯한 군사반란 세력들이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정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섰다. 서울역에 10만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민주화의 일정을 방해하려는 신군부에게 반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신중론이 득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는 중단되었다. 광주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한 시위가 일어났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계엄령 해제’ 등을 요구한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열렸다. 그리고 5월 18일, 완전 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전남대 학생들을 통제하면서 5.18은 시작된다. 공수부대원들은 “학교 출입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던 학생들을 진압봉을 휘두르며 마구 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의 행동은 이전에 익숙히 봐오던 시위 진압 양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심으로 진출했다. 계엄군들은 금남로에서도 학생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가톨릭 사제의 입에서조차 “M16 소총이 내 손에 있었으면 나는 전원을 사살했을 것”이라는 절규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계엄군들의 ‘상식 밖’의 만행이 벌어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대학생들보다는 양복 입은 회사원들, 주변 가게의 종업원들, 노동자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 고등학생들이 더 많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열흘간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5.18은 순수한 민주화 요구에서 시작되었고, 5.18에 가담한 사람들은 ‘북한군’도 ‘불순분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시민군을 만들고, 5월 27일 마지막 도청이 함락되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간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리며 함께 터져나온 총탄으로 평범한 이웃들이 죽어갔다. 애국가를 합창하며 태극기를 흔들던 국민을 국가가 죽인 것이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 민우 역시 택시 운전을 하며 공부 잘하는 동생 진우를 뒷바라지하는 낙에 살았으나 이때 동생을 잃고 만다.” 5.18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일으킨 항쟁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1968년 혁명에서도 보였던 현상이다. “흔히 대중들이 혁명적 이념을 갖고 봉기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를 획득한 후에 봉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 평등, 인권 등의 보편적 이상(ideal)을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하고자 할 때 봉기가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대중들의 힘이 조직될 때 혁명으로 나아간다.”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는가 : 총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귀중한 생존 도구 “이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거리 위로 격정에 못 이겨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뛰어나간 청년들에게도, 부상당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든 사람들에게도 어김없이 조준 사격이 가해졌다. 공수부대가 물러감으로써 평화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길 바랐던 시민들의 소박한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이제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흔히 역사 왜곡 세력들은 5.18을 ‘폭동’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총을 들고 군대에 대항해 싸웠으니 폭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을까? 이 책의 9장 <저항하는 사람들의 윤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당시 계엄군은 광주 시민을 적으로 여겼지만, 시민들은 군인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 발표된 유인물 <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에도 “우리들은 국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되어 있다. 시민들이 식사를 하지 못한 군인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준 이유도 군인을 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당시 시민군이 발표한 성명서에 ‘총을 든 이유’가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발포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총을 드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즉 “시민들에게 총은 타인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