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관계주의 인류학으로 살펴보는 셰르파 셰르파족은 다종족 국가 네팔에서 인구 규모로는 35번째에 지나지 않지만(네팔 인구의 0.426퍼센트), 네팔 내 두 번째로 많이 연구된 종족이다. 이는 셰르파족이 히말라야 등반 산업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근대 이후 등반이 서구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정복'과 탐구(즉 인류학적 연구)의 통로로 활용되었음을 암시한다. 인류학자이자 등반가인 저자 오영훈은 오랜 기간 셰르파의 마을과 고산 등반의 현장에서, 또 한국이나 미국 등 그들의 이주지에서 그들과 긴밀하게 교류해왔다. 저자는 짧은 기간 급격한 정체성의 변화를 겪어온 셰르파를 '관계주의 인류학'의 관점, 즉 모험적이고 광범위한 삶의 국면들을 길고 복잡한 연쇄 속에 놓고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존 셰르파 연구들이 지닌 한계―서구 중심주의 또는 종족 환원주의 등―를 극복한다. 이 책은 셰르파의 삶에 시골 생활과 초국가 이주, 농·목축업과 국제 산악 관광산업, 친족 및 젠더 관계와 웃음의 심리학, 토착 종교와 세상과 미래에의 상상, 종족 정체성과 출신 마을과의 상관관계 등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조합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본다. 셰르파의 종족성과 등반의 문화사 흔히 '셰르파'라는 호칭은 히말라야 등반에서 짐꾼이나 가이드 등의 조력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거나 네팔 소수민족의 종족명으로 이해된다. 셰르파의 종족성은 네팔의 국가주의(직업과 종족성이 동일시되는 네팔의 카스트 제도)와 관광산업에서 긍정적으로 활용되기도 하고(주변 타 종족이 고산 등반에 특화된 셰르파족을 자칭하는 등), 산악 관광에 참여하는 셰르파의 다양한 역할은 '종족 집단 셰르파'와 '원정대의 핵심 피고용인 셰르파' 두 집단 모두의 위세를 함께 신장시키는 전략으로 사용된다. 히말라야 등반을 둘러싼 논의는 히말라야 등반의 주역 셰르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와 맞닿아 있다. 근대 서구에서 인류학은 탐험·등반의 전통과 함께 발전해왔고, 대개 현지 주민(과 그들의 속성)을 낭만화하여 이들에게서 '잃어버린 인류의 본성'을 찾으려는 서구인의 시각(저자는 '인류낭만주의Anthromanticism'라는 용어를 창안했다)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셰르파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 이후 산악 관광산업이 고도화되고 셰르파들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커졌음에도 여전히 셰르파는 드러나지 않은 참여자로 소외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셰르파의 이중적 정체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 정체성들이 때로 갈등하고 때로 중첩하면서 셰르파의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삶의 양태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히말라야 등반 산업과 새롭게 구성되는 셰르파 정체성 히말라야 등반 관광산업이라는 특수한 기회는 셰르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주로 산악 지대에 모여 살며 농사나 목축을 하던 이들은 국제 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는 관광산업이라는, 개인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선택지에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다. 이 새로운 생계 기회에 대해 이들은 네팔 국내외 부분/완전 이주, 등반 원정대 참가 또는 원정 회사 직접 경영 등 서로 모순적이고도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고려한다. 또 공공성과 사회복지가 부재하는 네팔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공동체성은 모두 변화에 대응하는 생존 전략으로서 셰르파의 집단 정체성이 발휘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특히 최근 히말라야 등반 산업에서 셰르파들의 역할이 크게 변화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포터나 가이드에만 머무르지 않고, 직접 원정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기업을 경영하며 서구 중심의 왜곡된 등반 문화를 바꾸고 있다. 셰르파 종족성은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본질이 아니며 실체 없이 사회적 관계의 역학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본질주의와 구성주의의 이분법을 벗어나 셰르파들의 종족성의 실천에는 숱한 경로를 통해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관계의 역학이 있으며, 현재에도 이 둘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