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도서관에서 배웠다”
독서계와 과학계를 대표하는 지식인 4인방, 이용훈×이권우×이명현×이정모
읽고 쓰는 사람을 길러내는 아주 특별한 세계를 논하다
도서관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하나 최근에는 그 흐름이 심상치 않다. 울산대학교는 2023년 도서관 장서의 절반에 달하는 45만 권을 폐기하려다가 수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27만 권을 폐기했다. 고양시는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관내 공립작은도서관 5곳을 줄줄이 폐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던 2024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책과 독서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정작 ‘책과 독서의 전당’으로 불리는 도서관의 위상은 추락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는 초대 서울도서관장 이용훈, 도서평론가 이권우, 천문학자 이명현, 펭귄각종과학관장 이정모가 도서관에 대해 전방위적인 대화를 나눈 책이다. 도서관을 만나 읽고 쓰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지금도 그 주위를 공전하며 살아가는 ‘도서관 생활자’ 4인방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도서관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일깨운다. 30년 넘게 사서이자 도서관 전문가로 일해온 이용훈, 평생을 출판과 저술, 강연 활동에 매진한 이권우, 과학 책방 갈다에서 수많은 독자와 소통해온 이명현, 15년여간 과학관장을 지내며 과학의 대중화에 힘써온 이정모의 합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이 책은 이용훈, 이권우, 이명현, 이정모라는 네 사람의 도서관 경험을 아우른 기록이기도 하다. 종로도서관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책으로 ‘놀았던’ 소년 이명현, “책을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좋아서” 사서의 꿈을 품은 고등학생 이용훈, 원형 도서관에 앉아 온갖 책과 잡지들을 섭렵하면서 인문학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청년 이권우, 독일 본시립도서관 사서들의 집요한 권유로 읽은 책들이 계기가 되어 첫 책을 쓰게 된 작가 이정모. 그 이야기의 편린들을 따라가다 보면, 도서관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일생에 스며들고 한 사회의 ‘읽고 쓰는 사람’을 양성하는지 절감할 것이다.
“AI 시대에도 도서관에서만 가능한 것들이 있다”
천문학자와 서평가, 도서관장과 과학관장이
다채롭게 그려내는 도서관의 쓸모와 역할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챗GPT와 구글만 있으면 거의 모든 정보에 가닿는 시대에 책과 도서관이 왜 필요하냐고 말이다. 실제로 책 읽는 사람들은 나날이 줄고 있다.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발표한 최근 10년간의 추이를 살펴보면, 1년 동안 책을 한 권이라도 읽었다고 응답한 사람이 72%(2013년)에서 43%(2023년)로 급감했다. 저출생과 문해력 저하로 독서 인구의 감소세는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독서 행위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지금이야말로 책과 도서관의 쓸모와 기능을 재정립할 때다.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는 도서관의 과거와 현재를 톺아보면서 책과 도서관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를 짚어낸다. 천문학자 이명현은 《코스모스》의 ‘은하 대백과 사전’ 개념을 설명하면서 도서관을 지식과 정보의 지속 가능한 아카이빙을 가능케 한 ‘인류 문명의 중간 기지’로 명명한다. 도서평론가 이권우는 책을 빌려 읽는 ‘무상의 독자’가 있어야만 책을 사서 읽는 ‘유상의 독자’도 존재한다며 도서관이 독서 생태계 유지와 확장에 얼마나 필수적인지 설파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적 연대의 뿌리를 도서관에서 찾아낸다.
펭귄각종과학관장 이정모는 인공지능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하는 인재’는 독서라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정보 입력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데 여기에 도서관만큼 최적화된 공간은 없다고 강조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를 거닐며 우연히 어떤 책을 보고 ‘어, 이게 뭐지’ 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이러한 지식의 ‘우연한 발견’은 전자책이나 디지털 콘텐츠로는 기대하기 어려운, 오직 도서관의 종이책 서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초대 서울도서관장 이용훈은 초고령화에 따라 도서관을 찾는 노인 이용자들이 늘고 있는 현실을 들며, 새로 부상하는 독자층을 위해 도서관에 어떤 변화들이 필요한지를 모색하기도 한다. 사서의 도서관, 서평가의 도서관, 과학자의 도서관이 부딪치고 교차하며 빚어내는 풍성한 이야기는 책과 도서관의 존재감을 다지는 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도서관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시민의 서재’를 가꾸고 지키는 이들에게 건네는 안내서
학생들의 독서실에 가까웠던 과거의 도서관을 떠올리면 오늘날 한국의 도서관 문화는 많은 발전과 진척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은 적지 않아 보인다. 이 책에서 네 명의 저자들은 드넓은 견문을 바탕으로 우리의 도서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초대 서울도서관장 이용훈은 보스턴공립도서관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 세계 4대 마라톤 대회로 꼽히는 보스턴 마라톤의 결승 지점 역할도 한다며, ‘큰’ 도서관보다 ‘가까운’ 도서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서평론가 이권우는 국내에서는 드물게 원형으로 된 지평선고등학교 도서관을 예로 들면서 교육철학의 변화에 따라 도서관의 공간 설계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펭귄각종과학관장 이정모는 독일 유학 시절에 만났던 본시립도서관의 사서들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참고정보서비스’의 중요성을 짚는다. 잡지에 실린 퀴즈를 틀린 이유가 궁금해서 달력 책을 몇 권 빌린 뒤로 사서들이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타이핑해주면서까지 관련 도서와 자료들을 권했던 것이다. 이때의 독서 경험은 고스란히 첫 저서 《달력과 권력》이라는 결실로 나타났고 그를 작가의 길로 인도했다. 그런가 하면 천문학자 이명현은 의정부과학도서관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경험을 들어 전통적인 독서 행위뿐만 아니라 동아리나 체험 활동처럼 책과 느슨하게 연결된 각양각색의 활동까지도 ‘도서관 행위’로 포괄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도서관이 단순한 아카이브의 개념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의 허브, 이른바 라이프러리(lifrary)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책과 도서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만큼, 저자들의 대화는 사서의 일, 수서와 장서 관리, 종이책과 전자책, 프로그램 운영, 도서관 공간 설계 등 도서관 운영과 실무에 직결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아우른다. 귀감이 될 만한 국내외 도서관 사례들이 셀 수 없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용훈이 책의 서두에서 “도서관을 넘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서들에게 이 책이 든든하고 유익한 기반이 되어주기를”이라고 기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을 향한 맹목적 믿음과 자본의 논리가 우세하는 시대다. 저자들은 도서관이 메마른 정서의 목을 축이고 다양한 생각의 씨앗을 움트게 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오아시스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은 그 길로 향하는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