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어미’와 후예들의 신비한 관계, 이를 포착해 발화하는 존재의 의미
기존의 소설적 상상력의 범주-너머로 확장된 ‘새로운 소설’의 탄생,
‘소설의 자유’를 심화하고 확대한 ‘새 소설’!
1999년 중편「차 마시는 시간을 위하여」로 등단해 불가해한 삶의 면면을 유려하고도 고집스러운 문장으로 벼려내 온 작가 심아진의 두 번째 장편소설 『후예들』은 다채롭고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소설 속 소설가’가 집필해가는 소설을 이정표로 삼아 세 등장인물 효령, 귀연, 요세핀이 서로를 맞닥뜨리게 되는 날로 독자를 휘몰아가는 이 특이한 소설은 ‘메타-메타 픽션’, ‘메타적 화자’의 형식을 취해 독자로 하여금 서사의 안과 밖을 동시에 조망하게 한다.
즉 ‘메타-메타 픽션’, ‘메타적 화자’라는 형식은 단순히 소설가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가 소설’이 아니라, 메타 작가가 여러 장면에 개입해 작중 인물과 관계를 ㅤㅁㅐㅊ거나 대화를 나누면서 그 경계의 모호함과 뒤섞임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 중심에 존재하는 ‘혼어미’ 또한 화자로서, 인물들의 영혼을 매개하는 중개자로 등장한다. 소설 안 실재하는 혼어미는 “한때 우리의 어머니이고 누이이고 연인이며 스승이었”지만 현재는 그저 우리 주위의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밖, 세 후예들의 영웅으로서, 메타-메타 픽션 속 실재하는 혼어미는 먼 옛날 영웅의 후예들을 대변하는 인물로, “‘모두의 어미’가 되기 위해 누구의 어미도 될 수 없”었던 선택받은 영웅이다. 그렇게 혼어미는 소설의 안과 밖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세 인물의 기둥처럼 존재한다. 자신을 버린 뿌리, 가족의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양가감정을 지닌 효령의 앞에 수상한 노파로 나타나고, 헝가리에 가면 “아무에게나” 안부를 전해달라며 귀연과 요세핀의 존재를 냉연히 체화하고 있는 혼어미는 효령, 귀연, 요세핀이 서로를 만날 ‘그날’로 내달리는 모습을 마치 그들의 중심에 선 채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또한 영웅의 후예들, 즉 혼어미와 세 인물을 『후예들』 속에서 다시 소설로 그려내는 소설가 역시 그들 주위에 산재해 서사를 조망한다. 이렇듯 영웅들과 그 후예들의 신비한 관계와 이를 포착해 메타 화자의 입을 빌려 발화하는 존재들은 『후예들』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점거한다.
이처럼 소설 『후예들』은 ‘소설 양식’이 역사적으로 발생한 터전이자 ‘소설가 정신’의 근원인 ‘자유’의 정신에 바탕하여 오늘날 소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상투성을 벗어던지는 한편 근대 소설의 양식적 한계성을 돌파한다. 이는 심아진의 ‘특이한 소설 정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로 인하여 독자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더 깊이 자극받고 더 높이 고양되는, 한국소설사에서 특별한 도전적 의미를 지닌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소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생에 한 번도 홀로이지 않은 적 없는 자가 생을 실어 부르는 노래”
“아름답게 홀로”이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것들
“자신만을 사수한 채” “머무르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영웅과 그 후예들은 시간이 지나 그 세계가 투미해졌다. 모두의 어머니였던 이는 한낱 노파가 되어 “증명할 수 없는 세계에만 존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의 울타리를 아끼면서도 그에 잠식된 효령과 끊임없이 홀로이려, 영웅의 후예들을 닮고 싶어 했지만 끝끝내 홀로이지 못했던 귀연,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의 후예들을 가장 닮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찾아들어 가는 그의 딸 요세핀까지 그들은 모두 일평생 홀로 아름다우려 했으나 현실에서 짊어진 짐으로 인해 각고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영웅의 후예라는 점은 변함없듯이, 그들은 결국 “아름답게 홀로”일 삶의 경계선을 지나고 있다. 요세핀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고도 자신의 딸 윤지와 남편 사이에 자신의 배다른 자매일지, 조카일지 모르는 요세핀을 어떻게 “끼워 넣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받아들이려는 세상과 외면하려는 세상”의 힘겨루기를 하는 효령은 투미해진 후예들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귀연은 효령과 같은 세대의 후예이나 쇠락해진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집착으로 딸 요세핀을 잃어 불안해하면서도 끝없이 ‘나’를 되뇌는 혼란스러운 후예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요세핀은 자유로운 후예들을 가장 닮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관계에 얽혀 새로운 세계를 향한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새 후예들의 정체성을 계승했지만 곧 폭발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가장 많이 지닌 다음 세대로의 후예들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정착하지 않는 불완전한 생에 대한 근원적 이해
“자네는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게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나? 옛날처럼 먼지 풀풀 날리는 광야가 우리들의 자리인 줄 아나?”
어디에나,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하는 영웅들은 그들답게 끝끝내 홀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광야에 빌딩이 들어섰고, 다리, 공원이 생겼다. 영웅과 그 후예들이 가지는 ‘제자리’의 의미가 퇴색됐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무 곳이나 다 ‘제자리’라는, “자리라는 게 그렇게 눈에 딱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혼어미의 말을 따라 영웅과 그 후예들은 한평생 끊임없이 부유하면서 정착하지 않는 후예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혹독한 과정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후예들이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후예들』 속 소설의 문장처럼, “그렇게 많은 걸 잃고서도 여전히 남은 ‘혼자’를 추슬러 걸음을 옮”기는 후예들이 향하는 마지막 지대는 결국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자리”일 것이다.
“요세핀이 검은 앵클부츠를 성큼 내밀며 걷기 시작하자, 마태도 난도도 씨엉씨엉 따라나선다. 음악에 따라 춤을 추는 물 분수의 하얀 날개가 세상을 관조하며 퍼덕이고 있다. 지나치게 초록인 나뭇잎도, 너무 부드러운 풀잎도, 심하게 단단한 자갈들도 모두 빛난다. 요컨대, 햇빛 아래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다.”
옳다. 거기 더해, 반짝이는 것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후예들』은 정신적 자유와 독립을 지닌 영웅과 그 후예들의 옹호로 반짝이고 반짝이고 반짝인다.
―고종석·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투란의 추억, 또는 움직이는 영혼을 위한 송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