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렌즈

이경민 · 역사
352p
구매 가능한 곳

저자/역자

목차

프롤로그 - 표상되는 근대, 만들어진 조선 1부 제국의 렌즈로 조선을 붙잡다 - 사진의 거짓말과 빼앗긴 표상 일제, 조선 황실을 이미지 메이킹하다 - 황실사진과 표상의 정치학 아이콘이 되려한 황제, 고종 1907년에 생긴 일_변용하는 표상체계 황실의 일거수일투족을 표상하라 영친왕, ‘식민지의 태자’이자 ‘황국 군인’ 재현과 표상에서 끌어낸 조선 황실 천황의 사진과 감시하는 눈 - 표상으로 조선을 지배하다 신황제 순종, ‘표상’을 명하다 그러나 천황에 경배하라 어린 학도들에게 ‘봉배의 광영’을 읽을거리: 금관 기생 이야기 2부 구경거리가 된 조선의 땅과 사람 - 일제의 조선 재현 제국의 지도, 식민지 고고학 - 세키노 타다시와 조선고적조사사업 지도와 아카이브, ‘이름 짓기’의 과정 지배하기 위해 조사하다 고적조사사업의 자취를 더듬다 ‘보일 것’과 ‘보이지 말 것’ 근대학문의 실험장이 된 한반도 사진과 고고학의 공생 『조선고적도보』,그 완벽한 식민주의의 컬렉션 사진 아카이브로 역사를 비추다 재현된 역사 읽기 원시의 조선, 식민지 인류학 - 토리이 류조의 인체측정사진 20세기 말 다시 호명된 인류학자 학문의 열정인가, 제국에 봉사인가 토리이의 조선조사 사진과 근대의 시선 토리이가 ‘창출’한 ‘조선 인종’ 근대성의 선택과 배제 우경화가 다시 불러낸 인류학 구경거리 : 구보씨, 박람회에 가다_박람회 사진첩 농업과 임업 | 경제와 산업 | 토목과 건축 | 교통 | 교육 | 고건축 | 보건위생 | 비교사진관 | 기념사진관 3부 잠든 아침의 나라는 언제 눈 뜨는가 - 서구의 조선 만들기 진흙과 새끼줄의 나라 - 프랑스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의 조선 구경 근대(성), 표상, 오리엔탈리즘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을 찾아서 프랑뎅의 사진 컬렉션을 펼쳐보다 사진첩 속의 ‘표상덩어리’ 조선 프랑뎅을 넘어서_파리만국박람회와 조선인의 재현 외국인의 컬렉션, 사진과 출처의 퍼즐 맞추기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서러운 장면들 - 독일 조사관 헤르만 잔더의 조선 읽기 잠자는 동양을 깨우는 서구의 표상 독일인 방문자들 조사관 잔더의 한국 정보 수집기 식민지 조사사업과 한국에서의 사진 촬영 잔더의 동아시아 여정과 사진첩 읽기 러일전쟁의 흔적을 찾아서 러일전쟁의 제2전장_한반도를 찾아서 잔더의 여행길, 누구와 어떻게? 빈 역사 공간을 메우는 잔더의 아카이브 ‘신선한’ 아침의 나라 발굴하기 읽을거리: 전시되는 어린이, 아동의 탄생 보론 - 사진 아카이브의 현황과 필요성 고찰 사진 아카이브의 개념과 시대적 요구 사진 아카이브의 필요성 우리나라 주요 사진 소장처와 관리 현황 사진 아카이브 구성을 위한 일본의 대응 사진 아카이브,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나오면서_근대의 완전한 몸을 보기 위하여 주석 | 원고출처 | 찾아보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우리 근대의 ‘서러운’ 표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한일병합 100년, 조선을 ‘이미지 메이킹’한 이토 히로부미의 기획은? 사진의 거짓과 재현의 정치학을 읽어내는 치밀한 고해상도 논픽션!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근대 조선이 처음 카메라를 만나고 얼마 안 있어 이 땅은 식민지가 되었다. 사진이 결코 ‘투명한 창’이 아님을 감안할 때, 식민지 조선을 비춘 일제와 서구의 렌즈는 무엇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사진을 키워드로 하여 한국 근대 문화사를 선명하게 현상했던 『경성, 사진에 박히다』의 저자 이경민이 이번엔 보다 감도 깊은 문제의식과 밀도 높은 시선으로, 20세기 초 ‘사진의 정치학’을 추적한 새 책『제국의 렌즈』을 출간하였다. 150여 장의 ’낯선’ 사진과 ‘읽을거리’와 ‘구경거리’가 가득한 이 책은, 1부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제의 기획 아래 카메라 앞에 섰던 조선 황실의 ‘초라한’ 사진들을 통해 근대 조선의 욕망과 좌절을 살피고, 2부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조사사업 과정에서 생산된 사진 가운데 일본 건축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고적 사진과 인류학자 토리이 류조의 ‘이상한’ 인체 측정 사진을 분석했다. 3부는 프랑스 외교관의 신분으로 조선을 방문한 이폴리트 프랑뎅과 주일독일대사관 무관 자격으로 러일전쟁의 흔적들을 쫓아 조선을 여행한 헤르만 잔더의 ‘서러운’ 사진 컬렉션을 통해 구한말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의 사진 기록에 드러난 타자화된 조선(인)의 얼굴과 오리엔탈리즘의 기원을 더듬었다. 서양인과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들은 고종의 의도와는 달리 절대군주의 이미지와 강력한 황제상을 그려내지 못했다. (…) 고종에게 아쉬운 점은 어용사진사뿐만 아니라 메이지 천황의 어진영을 초월적이고 이상화된 아이콘으로 만들어낸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이미지 메이커가 옆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 「일제, 조선 황실을 이미지 메이킹 하다」 중에서 ■ 이 책을 말한다 -‘저들의’ 근대는 어떻게 이 땅을 조사하고, 구경하고, 전시했는가 # ‘조선 황제’는 그다지도 촌스러웠던가? - 일제의 ‘이미지’ 전략과 사진의 거짓말 “폐하의 참사진이 아니다!” 1909년 함경도 경성군에 사는 일단의 촌맹들이 운곡학교에 봉안된 순종의 단발한 모습을 보고 폐하의 참사진이 아니라하여 사진을 불살라버린 웃지 못할 일도 발생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전통적인 군주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랍고 낯설어서 취한 우발적 행동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식 복장을 한 국왕의 모습에 분노한 민중들의 항일의식의 표출이기도 했다. 「천황의 사진과 감시하는 눈」 중에서 제 몸집보다 네댓 배는 더 큰 짐을 진 지게꾼, 엿판을 든 꼬마아이, 초가집이 들어선 진흙투성이 골목……. ‘근대 사진’ 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세련된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조선 황실이나 황제의 이미지도 그렇다. 머리를 짧게 깎고 어울리지 않는 서양 제복을 입은 키 작은 고종 황제의 모습이 떠오를 뿐, 황실이나 황제라는 단어에서 풍겨 나오는 초월적이고 화려한 절대 권력의 이미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근대 사진’이라고 하면 우리가 언뜻 가지는 심상은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진짜 근대’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문학 작품이나 신문 기사에서 발견되어 영화나 드라마로 재창조되곤 하는, 우아하게 차려입고 백화점 쇼핑을 하거나 카페에서 환담을 나누는 세련된 ‘모던 한국’의 이미지는 왜 떠오르지 않을까? 이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사진’이 우리의 근대를 그토록 전근대적으로 표상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박아놓기’ 때문에 사진이란 정직한 매체라는 생각을 하지만, 찍는 사람의 의도를 넣어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대상의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는 매체가 사진이다. 일제, 특히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신경 쓴 식민지 지배 작업 중 하나는 사진을 통해 ‘일제의 지배를 받을 법한 나라 조선’을 그려나가는 작업이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천황의 권위 넘치는 어진영을 기획하는 등 ‘이미지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나갔던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 순행 사진, 기념사진, 국장 사진 등 다양한 국가 공식 사진을 촬영하게 하여 근대 한국의 이미지를 자신의 의도대로 창출해갔다. 고종은 사진 기술을 배운 왕실 서화가들에게 자신의 초상 사진을 찍게 하려 했으나, 이토는 일본인 사진사를 고종의 어용사진사로 붙여 조선 스스로가 황실과 근대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사진 속에서 황제 고종을 어설픈 ‘식민지 군주’ 정도의 이미지로 표상한 일제는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황태자 영친왕은 ‘식민지 태자’이자 ‘황국 군인’으로 속속 표상해 갔고 황실에서 시작된 표상 체계의 통제와 이미지 조작은 이후 진행된 각종 조사사업으로도 확대된다. # 박물관에 갇힌 ‘구경거리 조선’ - 인류학과 고고학으로 만들어낸 식민지 풍경 토리이 류조 만큼 조선을 온몸으로 본 사람이 있을까. 교통수단도 수월치 않았던 시절, 함경북도에서 제주도 그리고 다도해와 울릉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역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걸어서 다녔던 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가 본 조선은 그 자체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일제가 보고자 했던 조선이었다. - 「원시의 조선, 식민지 인류학」 중에서 식민지 시대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때 시행한 측량 수치의 오류를 수정하는 새로운 토지 측량을 시행한다고 한다. 토지 조사사업은 조선의 근대적인 지도를 만드는 작업인 동시에 효과적인 토지 수탈을 위한 예비 과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우리의 고문화재를 수탈하기 전에 그 준비로서 진행한 조사 작업 ‘조선고적고사사업’이 있었음을, 또한 이 조사가 사진촬영을 통해 우리 문화재와 유적·유물에 대한 방대한 이미지 자료를 축적했었음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적연구위원 세키노 타다시의 지휘 아래 『조선고적도보』라는 자료집으로 정리된 이 식민지 고고학 조사 작업은 식민지 조선을 시각적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원래 위치와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채 박물관(사진첩)에 전시되는 소극적인 물품으로 변화시켰으며, 나아가 이 유물들의 일본 반출이나 개인적 점유로 이어지는 준비 작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문화재 중에서 ‘보일 것’과 ‘보이지 않을 것’을 구분하여 서구인과 조선인들 앞에 내놓음으로써, 일제의 입맛대로 재현된 조선의 이미지를 관람객들에게 심어주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적 사진을 촬영하면서 유적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장치로 근처에 있는 조선인을 유물 옆에 세워두고 촬영한 방식은, 인물의 인격을 제거하고 눈금자로서의 기능만을 강조하여 의지나 인격 없이 일제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는 식민주의 담론을 표상하고 있다. 사진으로 표상된 식민주의 담론은 조선의 땅, 즉 유물·유적의 경우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인류학이라는 당시 제국주의의 지도 학문의 활약은 근대 일본의 손꼽히는 인류학자 토리이 류조의 조선 인종 사진, ‘신체 측정 사진’이라는 인류학 사진 아카이브를 남겼다. 중국, 대만, 몽골, 쿠릴 열도, 시베리아, 나아가 남아메리카까지 진출해 인종에 대한 현지 조사를 진행했던 토리이 류조는 조선인의 원시성, 전근대성, 육체성을 사진으로 표상해 일제의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자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 각 지방에서 ‘이주해오지 않은 순수 토착민’이자 백정이나 무당 등 토속성과 원시성이 부각되는 계층의 인물들을 선택해, 전형적인 인류학 사진의 촬영 방식인 정면과 측면 촬영을 통해 ‘야만적인 육체’로서의 조선과 조선인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근대화된 일본인들에게 그와 비교되는 자신들의 인종학적 우월함을 고취시켰다. 탑의 크기를 알려주기 위해 탑 옆에 뻣뻣하게 선 지저분한 아이, 다섯 명이나 열

이 작품이 담긴 컬렉션

2

본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왓챠피디아의 자산이며, 사전 동의 없이 복제, 전재, 재배포, 인용, 크롤링, AI학습, 데이터 수집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 주식회사 왓챠
  • 대표 박태훈
  •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대로 343 신덕빌딩 3층
  • 사업자 등록 번호 211-88-66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