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박정희와 청년 장교들은 왜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김재규는 왜 그토록 따르던 박정희에게 총을 쏴야만 했을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는 권력욕을 가리는 빈말이었을까? 박정희와 김재규는 ‘유신’에 중독된 사무라이들이었다! 메이지 유신부터 10.26까지, ‘유신’으로 묶인 한일 근현대사의 내면을 파헤친다 군사 쿠데타로 등장했지만 박정희는 세 번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승자로서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의 독재는 ‘10월 유신’으로 본격화되었다. 10월 유신은 박정희가 생각한 자기만의 ‘국가 개조 프로젝트’였다. 박정희는 왜 굳이 일본에 기원을 둔 유신이라는 관념을 가져왔을까? 메이지 유신, 쇼와 유신 그리고 유신 지사들…. 박정희에게 유신은 그저 지나간 시대의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다. ‘국가’ ‘천황’ ‘일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는 유신의 정신은 일본 근대화의 어두운 핵심이자 결정적 요인이었다. 일본은 ‘유신’으로 강대해지고 ‘유신’으로 몰락했다. 박정희는 그 ‘유신’에 매혹되었다. 박정희와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신의 세계에서 성장했다.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쿠데타들과 달랐다. 메이지 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선동한 기타 잇키와 황도파 청년 장교들을 잇는 한국판 유신이었다. 일본에서 실패한 쇼와 유신이 한국에서 성공했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수천만 명을 희생시켰듯, 박정희의 유신도 폭주해 국민 대학살 직전에 이르렀다. 부마항쟁 당시 몇백만 명을 죽여도 괜찮다는 박정희를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였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는 권력욕을 가리는 빈말이었을까? 일본의 유신 지사들도, 박정희와 김재규도 ‘유신’에 중독된 사무라이들이었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유신의 관념은 번영과 전쟁의 사이에서 마침내 세계대전으로, 그리고 파멸로 일본을 이끌었다 유신 지사 박정희는 국가를 탈취하고 번영시키고 마침내 파멸 직전에 이르렀다 한일 역사의 문제적 인물들을 움직인 동력, 그것이 ‘유신’이다! #1.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1936년 2월 29일, 나흘 전 시작한 청년장교들의 쿠데타(2.26사건)가 이제 막 종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국 육군 제1사단 보병제3연대 제6중대장 안도 데루조 대위는 황도파 청년장교의 한 명으로서 군부 내 라이벌인 통제파의 상급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안도는 쿠데타를 말렸으나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자 누구보다 열심히 현장을 지휘하고 사수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토벌군의 투항 권유 방송이 계속되자 안도는 부하들에게 투항을 명령한 뒤 자신의 목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즉사하는 데 실패하고 후에 사형당했다). 안도 데루조는 자결을 말리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전에 이 중대장을 혼낸 적이 있지. 중대장님, 언제 궐기하는 거냐고 말이야. 이대로 두면 농촌은 구할 수 없다면서. 결국 농민들은 구하지 못하고 말았네.” 다른 부하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쇼와 유신’을 내걸고 궐기한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사상적 지도자 기타 잇키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과 투옥 등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했다. 안도는 살아남은 부하들이 ‘유신’을 계속하기를 바랬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도 데루조의 유언과도 같은 말에서 ‘유신’은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책의 한 항목,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어떤 관념이고 정신이고 정념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기가 속한 세계를 바꾼다는 믿음 아래 자기와 타인을 기꺼이 파괴해버리는 마음이다. #2.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유신은 선언이 아니다. “이제 일본이 재통일되었으니 ‘유신’을 선포한다.”는 거창한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메이지 유신 원년으로 불리지만, 1868년 당시는 한쪽에서는 신정부가 수립되고 다른 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난세의 시기였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서경(書經)》에 기록된 표현이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가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되살아난 사건을 유신이라고 한다. 막부를 뒤집어엎은 신정부세력은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서경》에서 ‘유신’이라는 표현을 찾아 사용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여러 유신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한 결과 주어진 선물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청년 장교들의 2.26 쿠데타가 ‘쇼와 유신’을 내걸었던 것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신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걸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의 대의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성공 신화는 어느새 연속된 실패담과 괴담으로 이어졌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일본제국의 번영과 성공을 부르짖으며 사실은 자기 앞가림에만 열중하거나, 자기 생각에 현실을 뜯어 맞추며 부하와 동료, 국민을 태연히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이 일본을 이끌었다. 이상하고 기묘한 우연이 모여 일본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위험한 질주였다. 일본 근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문제적 인물들은 과감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역사 진행을 앞당기거나 궤도를 이탈하곤 했다. 만주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 거침없던 일본의 질주는 결국 가미카제와 ‘1억 옥쇄’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종결되었다. ‘유신’의 종말은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에 공헌한(?) 비밀 독립지사로까지 불리는 무타구치 렌야는 버마와 인도의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임팔전투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 무기가 없다, 탄약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등은 퇴각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탄약이 없다면 칼로, 칼이 없다면 맨손으로, 맨손도 안 되면 다리로 걷어차라, 다리도 당하면 이빨로 싸워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자기 파괴적인 유신-관으로 무장한 일본은 이처럼 파괴적인 생각을 앞세워 미국, 중국, 소련 등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세 방향 모두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유신이 마침내 당도한 초라한 결말이었다. #3. 성공한 ‘쇼와 유신’ 5.16과 한국의 유신 지사들: 박정희와 김재규 유신은 그냥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까? 일본에서 파멸을 맞은 유신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조용히 부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마침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역사에서 해방되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한 이들과 달리, 박정희를 비롯해 ‘일제’가 주인 행세를 하는 땅에 태어나 자란 세대들은 ‘유신’의 공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들에게 ‘유신’은 반짝이고 매력적인, 마땅히 남자라면 따라야 할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인물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각각 다를 수 있어도, 해방 이후 지금 우리와 잇닿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역시 박정희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 박정희와 박정희의 마지막 폭주를 막은 김재규는 각각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신’의 세례를 받은 세대에 속한다. 한국은 1972년의 ‘10월 유신’ 이전에 이미 ‘유신의 시대’에 돌입해 있었다.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청년 장교들의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군인들의 쿠데타와 달랐다. 메이지 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 세계전쟁을 꿈꾼 이시와라 간지와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주창한 기타 잇키 등을 잇는 한국의 유신,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일본에서는 실패한 ‘쇼와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인 사병들로부터 일본의 진짜 현실을 전해 듣고 새로운 일본의 장래를 추궁당했던 안도 데루조와 황도파 청년 장교들처럼, 박정희는 스스로 발견하고 체험한 가난한 대한민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