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란트 단체초상화

알로이스 리글 · 인문학
5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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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옮긴이 해제 8 발행인 머리말 17 서문 19 I. 전 단계 29 종교적인 역사화와 관련된 최초의 단체초상화 :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헤르트헨 판 하를럼의 세례자 설화 그림에 등장하는 요한 기사수도회원들 31 종교 단체의 독립적 단체초상화 가운데 최초인 예루살렘 순례자 초상 57 얀 판 스코럴이 그린 하를럼의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59 얀 판 스코럴이 그린 세 점의 위트레흐트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63 안토니스 모르의 위트레흐트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72 베네치아의 단체초상화 75 플란데런의 단체초상화 82 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1기 1529~1566 85 디르크 야콥스의 1529년 작 사수단 그림 87 작자미상의 1531년 작 사수단 그림 102 코르넬리스 토이니센의 1533년 작 사수단 그림 109 디르크 야콥스의 1532년 작 사수단 그림 124 작자미상의 1534년 작 사수단 그림 130 1554년~1566년 사이, 상징주의적인 첫 번째 시기 단체초상화의 두 번째 계열 134 작자미상의 1554년 작 사수단 그림 136 작자미상의 1557년 작 사수단 그림 146 첫 번째 상징주의적 시기 후반에 그려진 디르크 야콥스의 사수단 그림 153 디르크 야콥스의 1563년 작 사수단 그림 157 디르크 바렌츠 169 디르크 바렌츠의 1562년 작 사수단 그림 172 디르크 바렌츠의 1566년 작 사수단 그림 180 홀란트 미술에서 풍속화적인 것의 도래와 의미 187 I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2기 1580~1624 197 코르넬리스 케텔이 그린 디르크 야콥스 로제크란스 대장의 분대 201 피터르 이삭스의 1596년 작 사수단 그림 220 아르트 피터르스 228 아르트 피터르스의 1599년 작 사수단 그림 230 해부학 교실과 간부진 그림의 등장 236 아르트 피터르스의 <세바스티안 에흐베르츠 박사의 해부학 수업> 237 대 피터르 피터르스의 1599년 작 간부진 그림 241 하를럼 단체초상화의 시초 246 코르넬리스 코르넬리스의 1583년 작 사수단 그림 248 코르넬리스 코르넬리스의 1599년 작 사수단 그림 259 프란스 피터르스 드 흐레버가 1619년에 그린 사수단 그림 267 암스테르담 단체초상화에서 공간과 시간의 외적 통일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법 272 코르넬리스 판 데르 포르트의 1618년 작 간부진 그림 276 일명 피터르 하설라르 소위의 분대 282 랜스의 숲이 보이는 사수단 그림 283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 288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의 1624년 작 간부진 그림 289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의 1625년 작 사수단 그림 294 니콜라스 엘리아스의 1628년 작 간부진 그림 298 IV.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3기 1624~1662 303 토마스 드 케이저 304 드 케이저가 1619년에 그린 <세바스티안 에흐베르츠 브레이 박사의 골학 강의> 304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2년 작 사수단 그림 308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3년 작 사수단 그림 313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8년 작 암스테르담 시장들 320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알로이스 리글과 『홀란트 단체초상화』 알로이스 리글은 1858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린츠에서 태어나 빈에서 학문적 생애 대부분을 보낸 미술사학자이자 문화재 전문가이다. 빈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 고고학을 공부한 그는 1886년부터 10년간 오스트리아 미술공예 박물관에서 재직하며 본격적으로 미술사 연구를 시작했다. 박물관 재직 기간 후반부에 리글은 직물 담당 부서의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경험은 첫 저서 『고대 동방의 양탄자』(Altorientalische Teppiche, 1891)로 이어졌다. 이 시기 리글은 회화나 조각처럼 전통적으로 ‘순수미술’로 분류되는 작품 장식 문양과 공예품을 직접 다루었고, 이러한 실무 경험이 미술사를 보는 그의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897년 빈 대학 교수로 임용된 이후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며 고대, 중세, 근세를 아우르는 야심 찬 이론적 구상을 전개했지만, 1905년 마흔일곱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많은 기획을 미완으로 남겼다. 『홀란트 단체초상화』(1902)는 리글이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저작이다. 리글이 혁신적인 미술사학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한 것은 그의 두 번째 저서인 『양식의 문제: 장식사의 기초』(Stilfragen: Grundlegungen zu einer Geschichte der Ornamentik, 1893)였다. 이 책에서 리글은 장식 문양이 외적 조건에 종속되지 않는, 연속적이며 자율적인 ‘장식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기술하려 했다. 이를 위해 리글은 아라베스크와 같은 특정 장식 모티프들을 고대 ‘근동’에서 고전 고대, 나아가 초기 중세와 이슬람 미술에 이르기까지 추적했으며, 그 과정에서 ‘예술의욕’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예술의욕(Kunstwollen) 알로이스 리글은 예술의욕 개념을 정식화한 미술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예술을 개인 천재의 표현이나 단순한 모방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집합적 의지가 조형적 형식으로 드러난 결과로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리글에게 예술은 특정한 시대와 사회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세계와 관계 맺고자 하는지를 형식으로 조직한 결과이다. 예술의욕 개념에 대한 가장 분명한 정의는 1901년에 출간된 리글의 『로마 말기의 미술산업』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된다. 그 책에서 리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모든 의욕은 개인의 내부에서 그리고 개인을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형성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조형적 예술의욕은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사물의 외양과 인간의 관계를 규율한다. 시적인 예술의욕은 인간이 사물을 어떻게 상상하고자 하는지를 드러내듯이 미술은 사물의 형상과 색채를 인간이 어떻게 보고자 하는지를 표현한다. 인간은 단지 수동적인 감각적 수용자에 그치지 않고, 욕망을 지닌 능동적 존재로서, 세계를 자신의 욕망에 가장 명확하고도 순응적으로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이러한 해석 방식은 민족, 지역,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의욕의 성격은 우리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세계관이라 부르는 것 속에 담겨 있다. 즉 종교, 철학, 과학, 나아가 국가 운영과 법에까지 담겨 있다.”(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Alois_Riegl) 다시 말해서 예술의욕은 곧 세계관이 미적 형식으로 드러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단체초상화가 보여주는 17세기 홀란트의 예술의욕 알로이스 리글은 『홀란트 단체초상화』 서문의 24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술 작품에서 현대의 취향에 들어맞는 요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탄생시키고 바로 이와 같이 만들어 낸 예술의욕을 규명하는 것이 미술사의 과제임을 인식하는 즉시, 우리는 단체초상화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홀란트의 예술의욕을 드러내는 고유한 성격에 가장 적절한 영역임을 깨닫는다.” 『홀란트 단체초상화』에서 리글은 예술의욕의 규명을 미술사의 과제로 규정하면서 단체초상화야말로 홀란트의 예술의욕을 잘 보여준다고 보았다. 17세기 홀란트에서 단체초상화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배경에는 정치, 종교, 사회 조건의 급격한 변화가 놓여 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독립 전쟁과 종교개혁 이후 형성된 네덜란드 공화국은 군주나 귀족이 아닌 시민 공동체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였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였던 서부 연안 지역, 즉 역사적으로 ‘홀란트’라 불린 지역에서 암스테르담과 하를럼은 상업과 행정, 시민 조직이 밀집된 도시로 기능했으며, 공공적 단체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단체초상화는 바로 이러한 시민 사회의 구조 속에서 등장한 시각적 형식이었다.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부제는 “자경단 시대의 예술의욕”이다. 자경단은 17세기 홀란트에서 흔한 단체 형태였다. 자경단은 정규군과 달리 도시의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방위 조직으로, 17세기 홀란트에서는 주로 상업과 행정을 담당하던 부르주아 계층의 남성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사비로 무기를 마련하고 단복을 갖추었으며 평상시에는 도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다가 필요할 때 치안 유지와 방위를 맡았다.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가 공공의 책임을 스스로 수행한다는 자치적 시민의식의 표현이었고 리글에 따르면 이러한 성격은 단체초상화에서 평등한 병렬 구성과 집단적 정체성의 시각화로 나타난다. 단체초상화 속 인물들은 가족이나 사적 친분으로 묶인 존재들이 아니라, 자경단이나 길드, 자선 기관과 같은 공공적 목적을 지닌 조직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각자 독립적인 개인이면서도, 특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결합한 집단으로서 재현된다. 따라서 단체초상화는 개인초상화처럼 한 인물의 위신이나 개성을 강조하지도, 역사화처럼 영웅적 서사를 중심에 두지도 않는다. 시선과 몸짓은 과도한 서사적 행위를 지양한 채, 서로를 의식하거나 관람자를 향해 열려 있는 상태를 취한다. 단체초상화는 17세기 홀란트의 시민 사회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이미지다. 이러한 이유에서 리글은 단체초상화를 17세기 홀란트 예술의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르로 평가했다. 리글과 현대 사상가들 : 발터 벤야민, 안또니오 네그리 리글의 예술의욕 개념은 이후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많은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리글이 이른바 ‘데카당스’나 ‘야만주의’로 폄하되던 영역을 예술 발전론의 틀에서 해방시킨 점에 주목했다. 벤야민의 초기작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리글의 영향이 거론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벤야민에게 리글은 중심에서 밀려난 형식과 장르를 통해 근대 이전의 세계관과 정동을 사유할 수 있게 한 선구적 이론가였으며, 이는 벤야민 자신의 역사철학과 미학적 방법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프린스턴 대학교 독일어과 부교수 토머스 레빈에 따르면 “리글의 작업 중에서도 특히 예술의욕이라는 개념은 벤야민의 초기 저작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리글과 마찬가지로, 벤야민 역시 자신의 작업을 ‘예술작품을 하나의 시대가 지닌 종교적, 형이상학적, 정치적, 경제적 경향들의 완전한 표현으로 간주하는 분석을 촉진하려는 시도로 이해했으며, 따라서 그러한 분석은 특정한 학문 분야로 한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 후기 로마 공예에 대한 리글의 재평가는, 이전까지 폄하되었던 17세기 독일 비애극 장르를 벤야민이 재평가하는 작업의 하나의 유비로 기능했다.”(레빈의 논문 https://tylevin.scholar.princeton.edu/sites/g/files/toruqf3671/files/tylevin/files/levin-benjamin_and_theory_of_art_history.pdf) 이러한 계보는 21세기에 이르러 안또니오 네그리에게서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네그리는 리글의 “예술의욕” 개념이 “예술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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