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그럼에도 나는 지상의 필요한 천사다,
내가 보는 것에서 그대들이 지상을 다시 보고 있기에,
지상의 경직되고 완고한, 인간이 짜 맞춘 설정에서 벗어난 채로,
그리고 내가 듣는 것에서 그대들이 지상의 비극적인 소리를 듣고 있기에,
불안정한 망설임들 속에서 불안정하게 치솟는 소리를,
물을 뒤집어쓴 젖은 단어들처럼, 절반의 의미들이 반복되어
말해진 의미들처럼.
월리스 스티븐스
「농부들에게 둘러싸인 천사Angel Surrounded by Paysans」
파국의 폭풍 앞에 선 지성의 안간힘을 떠올리며
『필요한 천사들: 카프카, 벤야민, 숄렘에게 전통과 모더니티는 무엇이었나』의 표지에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 그린 <설교 뒤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이란 그림의 일부가 담겨 있다.(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제목 그대로―『구약성서』의「창세기」에 나오는―형의 분노를 피해 달아난 야곱이 황야에서 지내다 한 ‘사람’을 만나 밤새도록 씨름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그(야곱)가 사투를 벌였던 ‘사람’은 정말 ‘천사’였을까, 아니면 그저 꿈속의 환상이었을까?
우리는 유럽의 근대(모더니티)가 20세기 중반에 어떤 파국적 상황을 맞이했는지 알고 있다. 또한 이 시대의 한복판에 있었던 발터 벤야민이란 예민한 지성을 기억한다면, 그가 애써 소장했던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이 열려 있는 채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날개를 펼친 이 천사를 가리켜 ‘역사의 천사’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했다. 그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 하지만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온다. 어쩌면 벤야민 자신의, 그 시대 지식인의 운명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을까(모든 지식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겠지만)? 『필요한 천사들』의 저자가 말한다. 이 책이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 게르숌 숄렘, 이 세 사람 모두 벤야민이 읽은 클레의 〈새로운 천사〉와 비슷했다고. 역사의 폭풍이 모질게도 자신들을 기원들의 ‘에덴동산’ 밖으로 밀어 낸 상황에서 등 뒤에 남겨진 전통의 풍경을 돌아본 모더니스트였다고.
찢겨진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에서
『필요한 천사들: 카프카, 벤야민, 숄렘에게 전통과 모더니티는 무엇이었나』는 카프카와 벤야민, 그리고 숄렘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사상가를 “삼각형 삼아” 이들의 상호 접합을 시도하면서 “파국을 맞은 세계에 내던져진 20세기의 세 유대인 지성이 ‘진리’와 ‘계시’, ‘전통’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비평적 에세이(게오르크 루카치에 따르면 비평과 에세이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이다.
하나의 이름만으로도 쉽게 가늠되지 않는 깊이를 지닌, 이 세 사람의 공통분모를 거칠게 요약하면, 세 사람 모두 강하게 동화된 독일어 사용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셋 모두 아버지의 문화 가치에 저항했다. 각자 무척 다른 길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은 아버지가 버린 유대 문화와의 진지한 마주침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 세 명의 독일계 유대인(「보론」의 필자의 표현에 따르면 “두 명의 독일인과 세 명의 유대인”) 지성은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의 한계 영역에 위치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각자의 문학적 수단을 이용해 모더니티의 딜레마들을 탐지할 수 있었다는 점. 여기서 ‘한계 영역’이란, 앞서 말했듯이, 전통을 산산조각 내며 폭주하던 모더니티(근대)가 만든 “파국”으로 드러난 그 자리를 의미한다(이는 또한 숄렘이 지은 시의 표현을 빌자면, “신이 서 계시던 자리에 이제는 멜랑콜리가 서 있”는 시대를 가리킨다). 이데올로기의 살인적인 단순화가 역사적 현실을 도식화된 거짓말로 대체해 버린 시대에 전통과 모더니티의 한계 영역에서 이 둘 모두를 움켜잡으려 했던 이들의 지적 안간힘-기획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저항 행위, 전체주의가 영원히 말살하고자 한 풍부한 유산을 섬세하게 유지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실존을 전제로 저자인 로버트 올터는 카프카, 벤야민, 숄렘을 다시 읽으면서 현대 독일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 치열했던 포스트-전통 유대인들의 특징적인 ‘의식 구조들’을 일종의 현상학적 방식으로 탐색한다. 여기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계시”, “신적 언어”, “[율]법”, “주해”같이 철저한 신학 범주들이 세 작가에게서 차지하는 중요성이다. 얼핏 20세기 이후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후퇴로 비칠 수 있는 이러한 실마리의 제시가 혹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은 이러한 신학적 개념들의 그물망 아래 펼쳐 보이는 저자가 지닌 해석의 능력이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의 논의의 예증적 근거들을 세 작가의 픽션, 비평적 종합, 역사 기술상의 주요 작품―당연히 이것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지만―보다는 편지, 일기, 노트, 금언적이고 단편적인 조각에서 찾아낸다. 그리하여 언뜻 부수적인 듯 보이는 세부―기이하게도 알파벳과 물리적인 기입 행위에 초점을 맞추거나 텍스트라는 발상 및 텍스트성이 진리의 수단이라는 관념에 매혹을 느끼거나 천사의 이미지에 매료되는 세 사람의 상상력을 표시하는 일종의 워터마크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이들 작업을 따로 검토할 때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인식적 차원을 보여 준다. 다르게 말하면 유대 전통의 개념적・정신적 세계에 세 사람이 느낀 향수, 감상을 엄격히 배격한 이 향수가 어떻게 이들 글쓰기에 특유의 방향을 부여해 주었고 모더니티에 대한 우려에 특별한 날카로움을 더해 주었는지를 규명해 낸다(예컨대 지금까지 문학적 알레고리로만 해석되어 온 카프카 해석의 새로운 근거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이는 획기적이다).
누가 스쳐가는 신의, 천사의 얼굴을 보는가
『필요한 천사들』은 길고도 두려운 세계대전의 시작이 어렴풋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암울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카프카를 두고 나눈 의견 교환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언어(전승으로서의 히브리어와 독일어) 사이의 긴장이 의미하는 바와, 텍스트와 해석(주해)를 둘러싼 상이하지만 세 사람이 추구한 공통성, 계시와 기억의 문제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역사의 천사에 대한 니힐과 갈망)을 안간힘을 다해 붙들려 했던 세 지성의 역설적 사유의 가치와 의미를 해명하려 시도한다.
로마, 예루살렘, 파리, 베를린이 불길에 휩싸일 위험에 처한 순간에 숄렘과 벤야민 두 사람에게 카프카 이해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성년이 되어 맞이한 새로운 세기에 이르러 오랫동안 믿음, 가치, 공동체를 지탱하던 구조가 산산이 조각났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 19세기 산업화와 도시화가 쌍둥이를 이루어 발휘한 내파력이 이 과정을 초래했다고 이해한 벤야민과, 유대 역사의 내적 흐름을 추적하면서 17세기의 메시아주의적 격변들과 그 여파로 생겨난 급진적인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에서 모더니티로의 파열적인 이행을 위한 하나의 대규모 패러다임을 보았던 숄렘, 이 두 사람 모두 인류가 형이상학적 나침반의 안내 없이도 실존의 황무지를 헤쳐 나갈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지혜를 공유하
고 궁극적 현실들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의식하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역량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이 역사적 탈구 전체의 모순들을 회피하지 않고 포용하는 능력을 보유한 카프카의 문학적 텍스트들은 역설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역능의 단초였다. 카프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