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살인사건

김호
4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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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일어난 살인사건은 누구에 의해, 무슨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조선 후기 살인사건을 다룬 600여 종의 사건 조사 보고서인 ‘검안’은 이를 생생히 기록한 자료이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료를 통해 조선 후기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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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1. 일상의 폭력 ? 상놈 집에서 목을 맨 반가의 여인 - 경상북도 문경군 신북면 황씨 부인 사건 ? 애달픈 첩살이 - 경기도 강화부 하도면 나씨 사건 ? 사람이 아니라 여우였다 - 충청남도 면천군 송암면 양반 조태원 사건 2. 향촌의 실세 ? 의옥의 발명, 향촌의 권력자들 - 경상남도 산청군 압동 김조이 사건 ? 조상의 묏자리로 이익을 다투다 -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김갑산 사건 ? 약자 위에 군림하는 약자들 ? 평안북도 용천군 이추규, 황해도 신계군 박봉록 사건 3. 인륜의 역설 ? 복수는 나의 것, 용천뱅이의 비극 - 전라북도 남원군 남생면 김판술 사건 ? 남편을 죽이고 어미의 손에 죽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김암회 부부 사건 ? 이중의 질곡, 추문에 휩싸인 여성들 - 충청남도 서산군 동암면 유씨 부인 사건 4. 욕망의 분출 ? 뒤엉킨 욕망들, 통간과 겁간 사이 - 강원도 지평군 하동면 김정선 사건 ? 넘치는 무고, 불신사회의 민낯 ? 충청북도 회인군 동면 김학서 사건 ? 돈 앞에 상전 없다 - 경기도 여주군 개군산면 김인규 사건 5. 변화하는 세상 ? 의로운 폭력, 인간다움을 포기한 대가 ?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 동학교도 이학조 사건 ? 변화의 시대, 섬마을의 야소교인 ? 경기도 인천군 영종도 조문주 사건 ? 우국지사인가, 탐관오리인가 ? 황해도 서흥군 군수 최동식 사건 에필로그 부록 ? 본문의 주 ? 참고문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100년 전의 살인사건 보고서 ‘검안(檢案)’ 사회적 일탈의 현장에서 조선 사람들의 일상을 엿본다! 100년 전 조선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사람을 죽였을까? 그리고 그에 관한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살인사건 보고서, ‘검안(檢案)’이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조사관이 현장에 출동하여 시신을 검시하고 관련자들을 취조한 뒤 상부에 보고했다. 《100년 전 살인사건》은 바로 이 살인사건 보고서 ‘검안’을 통해 100여 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그 수사과정을 살피는 것은 물론, 살인이라는 사회적 일탈의 틈새에 묻어 있는 민중의 삶을 들여다본다. 검안에는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한 남편, 사람을 죽이고도 여우를 때려잡았다는 양반, 아이를 납치해 간을 빼먹은 나환자, 사위를 살해한 딸을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인 친정엄마 등 불륜과 폭력, 살인 같은 사회적 일탈 행위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행위들로 가득한 기록의 틈새에는 조선시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의 기쁨과 슬픔, 놀라움과 두려움이 묻어 있다. 죽은 자와 죽인 자의 부모와 형제, 이웃 들이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안에 담긴 100년 전 조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조선사회의 생생한 ‘일상’을 만나보자. 1. 김호 교수, 조선시대 법의학 연구의 문을 열다 - ‘검안’ 연구와 새로운 역사학에 대한 기대 검안은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검시하고 작성한 시체 검사 소견서, 즉 법의학적 판결문인 ‘시장(屍帳)’과 사건 관련자 심문 기록인 ‘공초(供招)’를 포함한 일체의 살인사건 조사 보고서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안은 2천여 책에 달하고, 사건으로 치면 대략 500여 건이다. 대부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즉 100여 년 전에 작성된 기록들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역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였지, 부인이나 남편을 살해하고 한 장의 진술 공초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김씨 부인이나 옆집 이씨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김호 교수는 국가 기록이나 정치가나 경세가 들이 남긴 문집이 아니라 범죄 사건의 진술 기록을 사료로 삼았다는 점에서부터 차별적인 역사 연구의 길에 들어선 셈이다. 김호 교수는 역사학계에서는 드물게 조선 시대의 의학사를 연구에 발을 들였고, 그와 관련된 조선의 과학과 사회를 연구하던 중 법의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여 년 전 규장각 서고에 보관된 ‘검안’을 읽으면서 조선사회의 범죄와 그에 따른 처벌 등에 관심을 갖고 법치와 덕치, 정치와 윤리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해온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100년 전의 소민들도 지금 우리들 각자가 그런 것처럼,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에 필자는 앞으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필부필부의 증언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할 생각이다. 한마디로 주목받지 못했던 무명씨의 이야기를 기억하려는 것이다. -<프롤로그>(13쪽) 중에서 2. 조선시대 과학수사의 현장을 만나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 법의학의 실상 조선시대 살인사건은 어떻게 수사하고 판결했을까?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의 수사 기록을 이 책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100여 년 전에도 살인사건 조사과정에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과 용의자의 자백도 중요했지만 법의학 증거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시체를 검시하여 사인 분석에 참고했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는 자살로 위장한 살인사건이 많이 발생하면서 법의학 지식도 함께 발전했다. 조선 최고의 법의학 교과서인 《증수무원록언해》에 실린 여러 가지 수사기법이 수사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시체는 사건 발생 지역에 그대로 두고 검시했고, 부패가 빠른 여름철에는 신속한 조사를 위해 조사를 맡은 지방관의 출발과 도착 일정까지 상세히 보고했다. 살인사건은 통상 두 사례의 조사를 실시했는데 초검관과 복검관은 각각 조사를 지휘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며, 1‧2차 조사의 내용이 같으면 사건을 종결했지만 의심이 가는 경우라면 3차 혹은 그 이상의 조사를 실시했다. 한편, 검안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검시 보고서 ‘시장’은 시체 상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묘사, 기록하고 있어서 당대 검시 방법이나 법의학적 지식은 물론 의복 등 민중들의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드라마 〈별순검〉(2007~2010)에도 반영돼 대중에게 선보였다. 조선시대의 검시는 지금처럼 시체를 해부하는 게 아니라 시체의 외상과 색(色)을 주로 살폈다. 사인에 따라 외상의 모양이나 색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미 시체가 부패하여 검시가 불가능하거나 사대부 부녀자들의 경우처럼 시친(屍親, 죽은 사람의 친인척)이 죽은 사람을 두 번 욕보인다고 여겨 면검을 요청하는 경우에는, 검시를 생략하거나 시친의 면검 요청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살인사건이 관청에 접수되면 조사관은 아전들을 대동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사건현장을 찾아 시체가 놓인 장소를 세밀하게 묘사한 후, 시체의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면서 시체의 상태를 기록했다. -<프롤로그>(16쪽) 중에서 3. 조선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로 되살아나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지 못한 수많은 소민의 이야기를 찾아서 검안에는 ‘시장’과 함께 오늘날의 녹취기록에 버금가는 취조기록인 ‘공초’가 실려 있다. 살인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심문했는데, 아전들이 모든 진술을 구어체 그대로 기록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당대의 많은 소민의 목소리가 아전의 손을 빌려 생생히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검안에 전하는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양상을 살펴보면, 강도나 절도가 살인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검안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특히 여성(혼자 사는 과부, 외지에서 왔거나 가난하여 남의 집에서 기식하던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물론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장 내밀한 사회집단인 가정 내에서도 발생했다. 살인으로 비화된 폭력은 개인 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향촌의 양반 가문, 계나 두레 같은 평민들의 상호 부조 조직 등 다양한 이익 집단들 간에도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1904년 5월 15일, 경상북도 문경의 군수 김영연은 관할지역인 신북면 화지리에 사는 양반 안도흠의 소장을 받았다. 하루 전인 5월 14일 이웃에 사는 상놈 정이문이 저녁에 몰래 집에 들어와 며느리 황씨를 겁간하려다가 아들 안재찬에게 발각되자 도주했다는 내용이었다. 안도흠은 반상의 구별이 엄격하고 남녀의 유별이 분명한데 어찌 상놈이 반가의 여성을 겁탈할 수 있냐며 도주한 정이문 대신 그의 조부라도 체포하면 손자가 관아에 자수할 것이니 이를 기다렸다가 처벌해달라고 군수에게 요청했다. … 그런데 취조과정에서 정태극은 자신의 손자가 이미 안도흠의 며느리 황씨와 5년 이상 불륜관계를 맺어왔다고 진술했다. 사건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상놈 집에서 목을 맨 반가의 여인>(30-31쪽) 중에서 조선 후기에 양반이 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박지원은 진정한 양반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고, 정 약용은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모두가 양반이 될 수 있다고 해서 아무나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양반이려면 ‘양반다움’을 갖추어야 하는데, 한마디로 그 지위에 걸맞은 품격과 책임감을 갖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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