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이론으로의 ‘입문’을 돕는 1장에서는 “퀴어 이론이란 무엇인가?”보다 “무엇이 퀴어 이론을 ‘퀴어’이론이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퀴어 이론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계보를 그리는 작업은 그 자체로 매우 정치적인 작업이다. 퀴어 이론의 역사를 정리하는 텍스트들을 보면 저마다의 위치성과 정치성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 혹은 누구를 다른 존재나 사안보다 더 중요시하는지, 무엇 혹은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 혹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말쑥한 단일한 이론사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퀴어 이론을 정리하는 모든 시도는 그 자체로 항상 이미 편파적인 선택일 것이다. 1장은 지금까지 퀴어 이론의 계보를 정리하는 시도들이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퀴어’와 ‘퀴어 이론’의 의미 및 의의, 방향성을 함께 사유해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2장 <트랜스멍멍이를 버틀러가 논박하다>에서는 한국의 페미니즘 지형에서 이렇게 가시화된 적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새로이’ 등장한, 퀴어를 혐오하는 페미니스트들이 퀴어 이론을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여 트랜스 혐오에 동원하는 양상에 맞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이론으로 그들의 논리를 깨부순다. 퀴어 이론사의 초기에 나온 텍스트임에도 버틀러의 논의는 젠더 규범의 작동 방식과 우리가 그 규범에 맞설 방법 둘 다를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
3장 에서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 퀴어에게 자기 정체성을 호명하는 패러다임이 크게 변화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기존의 LGBT 범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새로운 퀴어 정체성이 폭발적이고도 다채롭게 등장한 현상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한국의 퀴어들을 위해 이 정체성들을 이해하고 언어화하는 데 도움이 될 이론적 자원과 이 정체성들에 대한 계보학적 비판을 함께 제공한다. 한편으로, 이 이름들은 나중에 생겼을지라도 삼십여 년 전에 나온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의 벽장의 인식론에서부터 이 급증한 정체성들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한편, 기존의 정체성 정치에 포섭될 위험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정치를 교란시키고 뒤엎을 잠재력 또한 품고 있는 이 새로운 정체성들은 성적 지향과 정체성에 관한 더 정교한 분석틀이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짚어준다.
4장 <벽장의 인식론>은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의 벽장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벽장과 커밍아웃의 복잡한 역학을 탐색한다.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존재들의 삶에서 벽장과 커밍아웃은 깔끔히 분리될 수도 없고, 전자가 현실에 안주한 것이고 후자가 진보를 대표한다는 식으로 가치 평가될 수도 없다. 이 장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 공론장에서 성소수자 이슈를 다루는(혹은 소비하는) 방식을 살펴보면서, 동성애/이성애라는 인위적 대립으로부터 만들어진 대표적 표상인 벽장과 커밍아웃에 공/사 구분, 지식-무지-권력의 문제, 행위-발화-정체성의 관계 등이 모순적으로 뒤얽혀 성소수자들을 규제하거나 그 규제에 균열을 내거나 또 다른 규범을 강화하는 식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5장 <동성애 규범성과 퀴어 부정성>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에이즈 위기 이후 미국에서 주류 게이 레즈비언 운동이 기존 사회 규범에의 동화를 목표로 움직이면서 새로운 ‘동성애 규범성’이 구축되어온 양상을 살피고, 이 동성애 규범적 주류화 전략이 전파하는 대표적 이데올로기인 퀴어 리버럴리즘과 호모내셔널리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2부에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강요하는 규범적이고 획일적인 미래에 맞서는 ‘퀴어 부정성으로의 전회’를 논한다. 그리고 이 부정성의 정치가 퀴어들의 미래에 대해 어떤 대안적 인식론을 제공하는지를 살펴본다.
6장 <퀴어 정동 이론>.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혐오와의 싸움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되었지만 늘 새롭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진보라고 할 만한 변화도 있지만, 혐오 세력들은 그러한 진보를 무시하거나 그에 맞춰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혐오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다 보니 퀴어들은 공동체 밖에서 자신이 성소수자로서 겪는 상실과 두려움을 드러낼 수 없는데, 공동체 안에서도 이제 너무 지치니 나약한 감정 따위 그만 좀 드러내라며 침묵을 종용당할 때가 있다. 자긍심, 사랑, 희망처럼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긍정의 언어가 중시되는 동안, 슬픔, 절망, 고립감,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은 공동체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나약함으로 치부되어 공적 영역에서 제대로 언어화되지 못하고 개인이 감내해야 할 문제로 밀려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퀴어 정동 이론가들은 부정적인 정동 중에서도 어떤 것이 배제되고 어떤 것이 국가, 정부, 전쟁을 위해 동원되고 찬양되고 선정적으로 전시되는지를 분석하는 한편, 부정적인 정동을 어떻게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자원으로 사유할 수 있을 것인지를 탐색한다. 여기서 정동은 사회정치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엮어 짜는 키워드다. 누구의 슬픔만이 인정받고 어떤 것만이 행복으로 인정받는가. 계속되는 절망에 지쳤을 때 우리는 이 만성적인 우울 상태를 어떻게 사유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이 부정성으로부터 어떤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이는 기존에 우리가 무엇을 쓸모 있다고 여기고 무엇을 쓸모없다고 여기는가를 나누는 기준 자체를 다시 숙고해보는 작업이자, 기존에 우리가 ‘정치’라고 알고 있고 상상하던 것과는 좀 다른 정치를 상상하고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