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크리세이스
테르시테스
헬레네
판다로스, 아이네이아스
유모
네스토르
아킬레우스
디오메데스, 오딧세우스
파트로클로스
사르테돈, 텔라몬의 아이아스, 헥토르
포이닉스
안틸로코스
아가멤논
강
안드로마케
프리아모스
데모도코스
후기
제2의 아름다움, 전쟁에 관한 사설
호메로스, 일리아스
알레산드로 바리코 · 인문학
262p



알레산드로 바리코가 각색한 일리아스로, 일리아스라는 전쟁 이야기 속에 그리스인들이 숨겨놓은, 그리스인이 예전에 직관으로 알아차리고 소중히 간수해두었지만 끝내 실현시킬 수 없었던, 평화를 바라는 문명의 모습을 담았다. 폭력과 전쟁에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바라며 저술했다. <일리아스>는 비폭력과 전쟁이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을 두 가지 방법으로 제시한다. 전면에서는 전쟁에는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전쟁의 의무에서 해방된 문명이라는, 눈에 띄진 않지만 꾸준히 살아남는 가능성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이면, 잔인하기까지 한 전쟁의 장면 사이에서는 남성, 영웅, 소위 전장의 짐승들이 평화에 대한 갈망을 조용히 드러낸다.
금지된 감독, 침묵으로 세상을 다시 찍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신작을 만나보세요
왓챠 개별 구매
금지된 감독, 침묵으로 세상을 다시 찍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신작을 만나보세요
왓챠 개별 구매
구매 가능한 곳
본 정보의 최신성을 보증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정보는 해당 플랫폼에서 확인해 주세요.
저자/역자
목차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탈리아를 매혹시킨 21개의 모놀로그, 일리아스
2004년 가을, 이탈리아에서 차를 타고 귀가하던 사람들은 차마 차에서 내리지 못해 주차장을 서성여야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서 귀를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라디오의 볼륨을 끌어올렸다. 같은 시기, 이 텍스트가 낭독되던 낭독회장은 10만여 명의 유료관객들로 북적거렸다. 특별한 인기스타도, 요란스런 비주얼도 없는 낭독회와 라디오 방송에 이토록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비교적 드문 일일 것이다. 비록 낭독하는 작품이 서양 문학의 고전이며, 각색한 작가가 알레산드로 바리코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원작의 제목을 말하면 조금 더 놀라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제목은 누구나 알고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트로이 전쟁을 다룬 그 태곳적의 대 서사시이다.
일리아스, 3000년을 뛰어넘은 폭력의 위대한 대 서사
“나는 태고의 야만적인 시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리아스>를 각색하며 작가가 내비치는 속내는 단호하기까지 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시대는 그저 마음 편하게 <일리아스>를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리고 <일리아스>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다. 다시 작가의 말을 빌리면 ‘대단히 미묘하면서 충격적인 유형’의 시대, 전쟁과 일상적 폭력이 공존하는 바로 이 시대에는 ‘아주 사소한 일들도 특별한 의미를 띄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초등생 살인사건이나, 시위에 관한 폭력, 비폭력 논쟁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테러, 아니 휴전이라는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는 우리의 거창한 상황, 나아가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늘 손쉽게 폭력에 굴복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런저런 성찰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간들은 언제나 치명적인 불빛에 끌린 나방처럼 전쟁에 뛰어들었다. 어떤 두려움도, 자신에 대한 어떤 공포도 불길로부터 그들을 멀리 떼어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생명의 희미한 빛을 되찾을 유일한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진정한 평화주의의 임무는 전쟁을 극단적으로 악마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질 때에만 전쟁이 우리에게 항상 가져다준 아름다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저자가 보기에 <일리아스>는 전쟁 이야기, 그것도 전쟁하는 인류를 칭송하기 위해 지어진 전쟁의 기념비, 그 중에서도 세월을 뛰어넘는 걸작이다. 일리아스 속에는 뛰어난 전사, 고귀한 죽음, 훌륭한 무기에 대한 찬사가 가득하다. 사실 <일리아스>를 각색하며 저자가 떠올린 의문 역시 그와 관련된 것이었다. 왜 우리는 전쟁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 전쟁 이야기에 몰두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각색을 위해 텍스트를 꼼꼼히 검토하는 동안 저자는 이 전쟁 이야기 속에 그리스인들이 숨겨놓은, 아니 그리스인이 예전에 직관으로 알아차리고 소중히 간수해두었지만 끝내 실현시킬 수 없었던 그 무엇을 발견해낸다. <일리아스>라는 전쟁의 서사 속에 감춰져 있던 그것, 그것은 평화를 바라는 어떤 문명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인의 직관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의무감까지 느끼며 각색해낸 작품이 이 작품, 이다. 그리고 저자가 바라는 것은 폭력과 전쟁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는 또다른 아름다움, 그것이다.
또 다른 아름다움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아마도 진정한 평화를 향한 유일한 길일 것이다. 전쟁의 화약에 의존하지 않아도 우리가 존재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밝힐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세상만사를 맹목적인 죽음의 빛 아래로 데려가지 않고도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않아도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돈과 부를 유통시킬 수 있다는 것. 죽음의 언저리로 향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고귀한 것을 포함한 윤리적 차원을 발견하는 것. 참호 속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힘 속에서 우리 자신과 대면하는 것. 전쟁이라는 흥분제나 사소한 일상적 폭력의 메타돈(모르핀의 일종)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감동을 느끼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또 다른 아름다움 …… 우리는 언젠가 아킬레우스를 이 치명적인 전쟁에서 빼내 오는 데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가진 것보다 더 맹목적이고 한없이 부드러운 어떤 아름다움, 또 다른 아름다움일 것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일리아스, 3000년 간 간직해온 비폭력의 메시지
<일리아스>에서 저자는 행간에 숨겨진 비폭력의 메시지에 주목한다. 전쟁과 전사를 칭송하는 수많은 글들 속에, 평화를 바라는 그리스인들의 염원이 숨어 있다. 우선, <일리아스>는 승자들의 이야기이지만, 패자들의 사연 역시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일리아스>는 패자 역시 역사의 주인공들임을 암암리에 우리에게 암시해준다. 물론 전쟁의 승패는 폭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비폭력과 전쟁이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을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시한다. 전면에서는 여성들, 전쟁에는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전쟁의 의무에서 해방된 문명이라는, 눈에 띄진 않지만 꾸준히 살아남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대변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이면, 잔인하기까지 한 전쟁의 장면 사이에서는 남성, 영웅, 소위 전장의 짐승들이 평화에 대한 갈망을 조용히 드러낸다. 치열한 전쟁의 장면 앞에 이루어지는 길고도 긴 토론의 장면들…….
그것은 희미하고 미세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집요하다. …… 한 번도 끝나본 적이 없는 회합들, 한없이 이어지는 토론들 …… 말하는 것은 사실 이들에게 전투를 가능한 한 연기하는 수단인 것이다. 세헤라자데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말(言)은 전쟁을 멈추게 하는 무기이다. …… 전쟁을 어떻게 치를지 토론할 동안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 그들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들이지만 마지막 담배 한 대는 영원히 꺼트리지 않는다. 그리고 …… 물론 그러고 나서 진짜로 전쟁터에 나가면 이들은 전쟁을 피할 구실을 전부 잊어버린 채 광적으로 자신의 임무에 몰두하는 맹목적인 영웅으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그 전에 …… 의도적인 지체와 아이들처럼 뒤돌아보는 시선으로 이루어진 기나긴 시간, 여성적인 시간이 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이런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헥토르의 부인 안드로마케의 대사, 그리고 이야기 전체에서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의 독백이다.
신이 사라진 인간의 서사
그렇다면 이런 <일리아스>를 우리 앞에 다시 제시하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가 바란 것은 날것 그대로의 <일리아스>이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현대의 관중들이 편안히 앉아서 듣기엔 지나치게 긴 분량이다. 문체 역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힘들다. 사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일리아스>의 각색을 시도하지만, 그저 그런 축약본에 머물고 마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런 난점을 바리코는 이야기 전체를 1인칭 시점을 구사하는 스물 한 개의 모놀로그로 나누는 것으로 재치 있게 해결해낸다. 그 결과 원본의 이야기를 훼손하지 않으며, 태곳적의 전쟁 이야기가 우리 곁으로 자연스레 날아든다. 줄거리뿐이던 이야기가 등장하는 인물의 시선을 타고 생생하게 제시된다. 그리고…… 바리코의 <일리아스>에는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