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1992년 처음 출간된 이래 30년 동안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박완서의 대표작
2021년은 한국 문학의 거목, 박완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꼬박 1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타계 10주기를 기리며 박완서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연작 자전소설 두 권이 16년 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는 모두 출간된 지 2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한국 소설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이자 중·고등학생의 필독서로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독자들의 끊임없는 애정으로 ‘160만 부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이 두 권은 결코 마모되지 않고 자유롭게 의지를 펼치던 고(故) 박완서 작가를 형상화한 듯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모티프로 재탄생했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는 기존 판에 실려 있던 문학평론가 고(故) 김윤식 선생, 이남호 선생의 작품 해설과 더불어 박완서의 뒤를 이어 현재 한국 문학을 이끌고 있는 정이현 작가, 김금희 작가의 서평과 정세랑 작가, 강화길 작가의 추천의 글이 수록되었다. 박완서가 우리 곁을 떠나간 지 10년이 흐른 지금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후배 작가들과 함께 ‘지금 다시’ 박완서를 읽어보길 바란다. 또한 소설의 시대 배경인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작가 박완서 사진이 엽서로 제작되어 독자들을 위한 깜짝 선물로 책에 포함되었다.
기억의 더미를 파헤쳐 한 폭의 수채화로 완성한
날카롭게 빛나는 성장소설의 진수
『그 많던 싱아…』는 연작 자전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로, 1930년대 개풍 박적골에서 보낸 꿈같은 어린 시절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스무 살까지를 그리고 있다. 박완서의 실제 고향이자 『그 많던 싱아…』의 도입부에 아름답고 정감 있게 그려지는 시골 마을인 개풍 박적골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 땅으로 흡수된 지역으로 황해도 개성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뼈대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오빠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떠나며 홀로 남겨지지만, 손녀딸을 하염없이 안쓰러워하는 할아버지의 비호 아래서 따뜻하게 자라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는 1930년대 개풍 지방의 풍속과 훼손되지 않은 산천의 모습, 자연에서 모든 유희를 구하는 그 시절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놀이 모습 등이 박완서 특유의 기지가 엿보이는 유려한 필치로 그려진다. 풍부한 감성으로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문체의 매력을 소설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사소해 보이는 장면에서도 절묘한 비애와 아름다움을 뽑아내는 박완서만의 감성이 자라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박적골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을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최초로 맞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인 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 업혔으니 다섯 살 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 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 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 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32~33쪽)
고향 박적골 산천에 지천으로 자라나던 흔하디흔한 풀 ‘싱아’가 작중 주인공 ‘나’의 싱그러운 유년기를 대변한다면, 소설의 중반부부터 펼쳐지는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의 빈곤한 생활과 인왕산 자락을 뒤덮은 ‘아카시아’는 그의 성장을 위한 뼈아픈 통과의례를 은유한다. 1940년대 일제 치하의 학교생활과 변소에 가는 일도 주인집 눈치를 봐야 하는 서글픈 서울살이 속에서 점차 세상을 깨달아가는 ‘나’의 모습이 펼쳐진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89쪽)
소설의 후반부에 접어들며 ‘나’를 둘러싼 세계는 이제 1950년 한국사의 격랑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의 위기 상태로 치닫는다. 전쟁으로 무참하게 깨져버린 가족의 단란함, 그렇게 되기까지 엎치고 덮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로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매듭짓는 소설의 말미는 한국 현대 문학의 거목, 작가 박완서의 등장을 예고하는 프리퀄과도 같다.
박완서 문학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을 완벽하게 재현한
박완서 소설의 최고작
『그 많던 싱아…』는 이미 발표된 박완서의 여러 소설 속에서 파편적으로 드러나거나 소설적으로 변용되어 나타난 자전적 요소들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까지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히 제5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엄마의 말뚝 2」를 비롯해서 여러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소설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온 작가의 가족 관계(강한 생활력과 유별난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와 이에 버금가는 기질의 소유자인 작가 자신, 이와 대조적으로 여리고 섬세한 기질의 오빠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족 관계)가 예리하게 묘사되며 작중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 많던 싱아…』의 작품 해설을 쓴 고(故) 김윤식 선생과 개정판의 서평을 쓴 정이현 작가는 이 점을 언급하며 이 소설이 박완서 문학의 모태 혹은 원형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이 작가의 전 작품을 골똘히 읽어 온 독자라면 『그 많던 싱아…』라는, 전대미문의 ‘기억력에만’ ‘순전히’ 의존한 이 작품은 이 작가가 조심스럽게 써 온 「엄마의 말뚝 4」임을 알아차릴 수 있겠지요. 「엄마의 말뚝 1」이 박적골에서 서울로 와 바느질품팔이로 현저동에 머문 기숙(己宿) 여사의 몸부림이라면, 「엄마의 말뚝 2」가 그다음의 이야기고, 「엄마의 말뚝 3」은 기숙 여사의 죽음을 다룬 것 아닙니까. (…) 작가 박씨는 결코 (4)라는 번호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4)의 번호를 헌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김윤식, 「작품 해설」 중에서
김윤식 평론가의 분석처럼 『그 많던 싱아…』는 「엄마의 말뚝」 연작을 장편으로 확장시킨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작가에게 그 시절의 기억을 소설로 온전히 복원하는 것이 필생의 과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 정이현, 「지금 다시 박완서를 읽으며」 중에서
생전에 작가는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말했다.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 ‘나’와 가족들은 아버지와도 같던 숙부와 오빠마저 없는 세계로 내던져진다. 강인한 어머니와 영리하고 생활력 강한 올케, 그리고 이 모든 장면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리라 다짐하는 ‘나’가 소설의 말미 한국전쟁 직후의 텅 빈 서울에 남겨진 채로 작품은 일단락되며, 후속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