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테크놀로지와의 이종 결합을 통한 기이한 성적 쾌감
강력한 문체, 비범한 상상력, 기괴한 접근을 통해
섹슈얼리티를 정면에 배치한 문제작
"우리는 상처 속에서 자동차에게 살해당한 자들의 부활을,
길가에서 본 사망자들과 죽어가던 부상자들의 부활을,
아직 죽지 않은 수백만 명의 상상의 상처와 자태를 찬양했다."
인간과 기계 문명과의 결합을 통한 성적 쾌감
발라드와 캐서린은 서로의 외도를 통해 성적 자극을 받는 기이한 성생활을 즐긴다. 어느 날 발라드는 헬런의 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우연히 다시 만나 차 안에서 격렬한 성관계를 갖게 된다. 헬런을 통해 발라드 부부는 자동차 충돌과 성적인 쾌락의 결합을 추구하는 본을 만나게 되면서, 본이 인도하는 새로운 성적 세계를 탐닉하게 된다. 발라드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동차 룸미러를 통해 격렬한 본의 정사를 지켜보기도 하고, 때론 자신이 직접 자동차 충돌과 카섹스를 자행해 보면서, 점점 더 그의 에로티시즘에 끌리게 된다. 발라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내가 본과 섹스를 하는 모습을 감정이 배제된 성행위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한다. 네 남녀의 성적 충돌은 자동차와 위험, 섹스와 죽음 속에 오르가슴을 느끼면서 더 강렬한 자극을 향해 치닫는다.
강력한 문체, 비범한 상상력, 기괴한 접근을 통해 섹슈얼리티를 정면에 배치한 문제작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본능으로 식욕과 성욕, 수면욕과 배설욕을 가지고 있다. 성적 본능은 인류가 자손을 이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는 성적 욕구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그 신비를 파고들만 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성욕은 청각과 시각, 촉각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적 본능의 에너지(리비도, libido)는 일생을 통해 일정한 순서에 따라 다른 신체부위에 집중되는데, 이를 가리켜 성감대라고 하였다. 『크래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인 성감대의 자극으로는 쉽게 흥분되지 않는다. 자동차와의 충돌을 통해 기계와의 결합에서 성욕이 극대화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상대방의 외도를 상상함으로써 오르가슴에 이르기도 한다. 『크래시』를 단순히 특별한 인물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작품의 느낌은 상당히 복잡 미묘하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이들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자동차에서 느끼는 강렬한 페티시, 상징과 은유로 그려지는 에로티시즘
『크래시』를 ‘광기 어린 도착적 소설’로 치부할 수 없는 점은 바로 제임스 발라드의 필력이다. 내용 면에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외설적이고, 때론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속속 등장하지만, 그의 글을 단선적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는 그런 난잡한 내용 속에 은유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링컨 자동차라는 물체를 내부와 외부로 설정한다. 내부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성행위에 몰두하고, 이를 지켜보는 제삼자가 경외하듯 지켜본다. 외부에서는 남녀의 애무가 격렬해질수록 자동차를 애무하는 세차기의 움직임도 강렬해진다. 이런 인간의 성관계를 자동차로 대변되는 기계 문명과 연결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는 등장인물들이 테크놀로지를 페티시로 삼고 그것에 쾌감을 느끼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단지 ‘기괴하다, 불쾌하다’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이 작품을 폄하할 수 없다. 이 작품의 적나라한 표현에 숨겨진 은유와 상징을 찾아내는 것이 이 작품을 읽는 묘미가 될 것이다. 제임스 발라드의 상상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크래시』원작과 영화
『크래시』는 원작자인 제임스 발라드조차 자신의 글이 굉장히 선정적이고 파격적이기 때문에 영화로 만들 수 없을 거라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을 말렸고, 제작사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도덕적인 위기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감독의 대리인조차 「크래시」를 찍는 것은 당신의 경력을 끝장내버릴 거라며 극구 말렸지만,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런 말에 쉽게 포기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이유로 기어이 영상에 담아내고야 말았다.
「크래시」는 96년 칸영화제에서 영화의 대담함과 독창성을 인정받아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크래시」가 대상을 받지 못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크래시」는 이브닝 스탠다드의 영화 비평가, 알렉산더 워커로부터 “타락의 한계를 넘어선”이라는 실망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런던 영화제가 열리던 영국에서 첫 상영되는 날, 데일리 메일의 첫 페이지에 “자동차 충돌 섹스 영화를 금지하자”라는 기사로 도배되기도 했다. 「크래시」는 많은 논란과 파장을 일으켰으나 제임스 발라드의 ‘걸작품’으로 회자되면서, 그의 원작소설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