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포스트휴머니즘 비평의 이정표 캐서린 헤일스
‘인간 대 기계’라는 거짓 이분법 너머
포스트휴먼의 새 지평을 탐사하다
인간과 기계 사이 경계가 더욱 흐려졌다. 챗GPT를 시작점으로 생성형 인공지능들이 소위 ‘인간의 영역’에 긴밀히 뒤얽힌 결과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지배 혹은 대립의 서사로 파악하는 논의, 인간만의 영역을 기어코 복원하려는 시도는 현재 벌어지는 변화를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는 데 부단히 실패하고 만다.
캐서린 헤일스는 인간과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상호 작용 그리고 공진화에 대한 연구를 선도해 온 세계적 이론가로, 포스트휴머니즘을 학술 영역에서 최초로 정의하고 본격적 학문 분야로 발전시킨 석학으로 평가받는다. 헤일스의 주저에 속하는 이 책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는 인간의 언어(language)와 컴퓨터의 코드(code), 전통적 인쇄 문학과 현대의 전자 문학,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를 섬세하게 포착, 오늘날 인간이 지능형 기계들과 어떻게 뒤얽히며 포스트휴먼 주체성을 띠게 되는지에 대해 정밀한 해석을 제시한다. ‘인간 대 기계’라는, 우리에게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가짜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인간과 기계의 공존 관계를 적확히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선사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왔다. 우리는 컴퓨터를 만들었지만 컴퓨터도 우리를 만든다.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더는 그 이전의 인간과 똑같지 않으며,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한 디지털 원주민 세대의 뇌와 사고방식은 디지털 이주민이라 할 수 있는 부모 세대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가속화하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매개가 서로의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공진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 복잡성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이분법적 틀 바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힘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 작업에 유용한 도구들을, 헤일스의 인문학적 통찰과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옮긴이의 글 중에서)
소쉬르·데리다의 언어학에서 C++ 언어까지
들뢰즈·라투르의 철학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까지
복잡하게 얽힌 현실을 꿰뚫는 ‘학제를 넘나드는 힘’
이 책에서 헤일스가 인간과 기계 간 복잡한 뒤얽힘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원동력은 다양한 분야를 횡단하고 연결하는 힘에서 나온다. 예컨대 헤일스는 인간의 ‘말하기’·‘글쓰기’와 컴퓨터의 ‘코드’ 간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말하기’와 관련해서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글쓰기’와 관련해서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코드’와 관련해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인 C++를 참고하며 이 셋을 한데 엮어 논한다. 이로써 인간 언어와 컴퓨터 코드 간 유사성과 차이점을 또렷하게 밝히고, 서로 다른 이 두 영역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 외에도 헤일스는 전통적 인쇄 문학과 현대 전자 문학 간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와 ‘아상블라주’ 개념을 차용하고, 라투르의 ‘사실물’과 ‘우려물’ 개념을 토대로 ‘물질성’을 재정의함으로써 디지털 시뮬레이션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인문학과 문학 그리고 컴퓨터학 등을 넘나드는 헤일스의 학제적 분석은 인간-기계 상호 작용을 분석하는 데 강력하고 유용한 틀을 선사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이 적어도 인쇄 전통에만 빠져 있는 문학 비평가와 문화 비평가가 이전과 똑같은 식으로 계속 작업해 나갈 수는 없다는 점을 납득하게 되기를 바란다. 언어와 코드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틀, 텍스트를 만들고 읽고 해석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 다른 매체로 물질적으로 예화되는 텍스트들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 과학 연구를 문화와 문학이론에 더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xxvi~xxvii쪽)
허구는 현실과 어떻게 연루되는가?
필립 K. 딕, 스타니스와프 렘, 그렉 이건의 SF 속
‘창발 중인 미래’를 읽는 문학적 상상력
이 책을 이끄는 또 다른 큰 축은 픽션, 즉 허구다. 인공지능에 대한 가설적 전망이 인공지능의 개발에 반영되어 향후 궤적에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듯,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는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기계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다. 헤일스가 이 책에서 ‘인간과 기계가 뒤얽힌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을 독해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들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가 앞으로 무슨 상황에 놓일지 미리 앞당겨 숙고·상상하게 하며, 이러한 ‘사고 실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듬게 한다.
이 책에서 헤일스는 필립 K. 딕의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스타니스와프 렘의 “가면”, 그렉 이건의 ≪퍼뮤테이션 시티≫와 ≪디스트레스≫ 등을 꼼꼼하게 읽고, 우리가 이미 마주하고 있거나 곧 마주할 상황들을 심도 있게 고찰한다. 정보 기술을 수단으로 인간 신체를 옭아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인간의 아날로그 의식에 기계의 디지털 프로그램이 얽혀 들 때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위성은 어떤 위기에 처하게 될까(“가면”).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화해 기계에 업로드할 수 있게 된다는 ‘포스트생물학적 미래’는 과연 장밋빛일까(≪퍼뮤테이션 시티≫).
이처럼 헤일스는 허구의 이야기를 경유해 인간과 기계가 뒤얽히는 상황에서 발생 가능한 상황과 쟁점을 적극적으로 상상해 봄으로써, 현재 ‘창발 중인 미래’의 단초들을 놓치지 않고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책의 구성
1부에서는 언어와 코드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기초를 닦기 위해 1장에서는 인간과 기계가 뒤얽히는 양상을 표현하는 상호매개(inter-mediation) 개념을 전개한다. 개념이 전개되면서 코드는 자연의 공통어(lingua franca of nature)로서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된다. 2장에서는 소쉬르의 기호학,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프로그래밍 언어를 체계적으로 비교해 언어에 대한 기존 이론들이 코드의 작용을 파악하기에 적절치 않음을 보인다. 3장에서는 헨리 제임스의 “전신 창구 안에서”(1898), 필립 K. 딕의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1966), 제임스 J. 팁트리의 “플러그에 연결된 소녀”(1973)를 사례로 분석하면서, 기술이 전보 같은 수동적 코드에서 정교한 사이버네틱 장치나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능동적 코드로 변형될 때 인간이 이들에 각각 어떻게 연루되는지 밝힌다.
2부에서는 인쇄 문학과 전자 문학의 상호작용을 분석한다. 4장에서는 작품(work), 텍스트(text), 문서(document) 등과 같은 기초 개념을 재검토하고, 문학 텍스트들을 아상블라주(assemblage, 조립체)의 무리로 개념화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한다. 5장에서는 언어와 코드, 인쇄 소설과 컴퓨터 프로그램 사이의 복잡한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를 원동력으로 삼아 내러티브를 구성한 사례인 닐 스티븐슨의 소설 ≪크립토노미콘≫를 독해한다. 6장에서는 셸리 잭슨의 전자 소설인 〈패치워크 소녀〉(1995)를 사례로 삼아 파편화된 주체, 복수의 분산된 원작자, 디지털 텍스트성 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3부에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 특히 이 둘이 인간의 주체성에 각각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7장에서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가면”(1976)을 독해하면서, 한 생명체 안에서 아날로그 의식과 디지털 프로그램이 뒤얽힐 때 벌어질 수 있는 사태를 숙고한다. 8장에서는 컴퓨터 속에 사는 디지털 생명체들과,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인간 사이의 역학을 탐구한다. 9장에서는 그렉 이건의 SF 소설들을 분석하면서, 인간이 디지털화한 자신의 사본(copy)을 만들어 컴퓨터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