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극단주의, 반지성주의, 생태 위기 시대의 파국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회학자 김홍중 브뤼노 라투르와 함께 서로를 지탱하며 가까스로 존재하는 생명들의 동맹을 발견하다 ‘봄비가 오면 나는 이제 몸을 움츠린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참사 이후 봄비는 오염 가능성이 있는, 뭔가 사악하고 위험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하는 저자 김홍중에게 21세기는 그렇게 왔다. 지식이 아니라 빗방울의 소름 끼침을 통해,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매일 먹이고 입혀야 하는 아이의 육체에 대한 근심의 형식으로,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감(感)의 형식으로. 지금껏 ‘그냥’ 흘러가던 세상은 돌연 ‘가까스로-있는’ 세상이 되었다. 파국의 한가운데에서 기후 위기와 대멸종은 이제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는 냉혹한 현실이 되었다. 재난과 종말의 감각은 삶의 심연까지 파고들며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진보·성장·번영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현실성을 잃었다. 테크놀로지는 여전히 미래를 환상으로 물들이며 담론을 지배하지만, 그 화려한 장막 뒤에는 무너져 가는 생태적 현실이 잔혹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파국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파국은 ‘시간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간’, 끝 이후에 펼쳐져 가는 시간이다.” 독창적인 개념들을 끊임없이 창안해 온 사회학자 김홍중의 신작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은 우리 시대를 파국의 개념으로 통찰하며, 우리가 어떤 언어와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대응해야 하는지 예리하게 묻는다. 그에 따르면, 파국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그 이후를 상상할 수 없는 종말적 상황을 내포한다.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 존재들이 멸종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생존하고 있으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김홍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시대 사회학, 사회 이론, 더 나아가 지성적 활동이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파국주의(catastrophism)는 단순한 비관이나 체념이 아니라, 파국적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역설적 태도다. 파국을 횡단하기 위해 김홍중은 인류세의 생태 파국이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브뤼노 라투르의 사유를 종횡으로 탐구한다. 라투르는 총체적 사상가다. 김홍중은 라투르의 박사 학위 논문에 담긴 신학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과학인류학 현장에서 창안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의 핵심을 짚고, 나아가 인류세 기후 위기와 정면으로 맞섰던 라투르의 가이아 이론과 생태 계급 이론을 논의한다. 신학, 철학, 사회학, 인류학을 넘나드는 라투르 사상의 전모가 이 책에서 투명하고 섬세하게 검토된다. 왜 지금 라투르를 읽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라투르의 존재론에 있다. 라투르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존재론적 감수성을 창조한 철학자다. 김홍중은 이 감수성을 ‘가까스로-있음(barely-being)'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고 있다. 실체를 곧 존재로 동일시했던 전통 철학자들과 달리, 라투르에게 존재는 충만하고 안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존재는 네트워크와 반복 속에서 가까스로 이어진다.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적인 소멸의 위협을 넘어서 간신히 존속함을 뜻한다. 라투르는 말한다. 뭔가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잠시 동안, 연결이 지속되는 동안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연어의 몸부림, 혹한 속에서 뿌리내리는 나무, 파국의 한복판에서 하루를 버티는 인간. 이들은 모두 가까스로-있음의 원리 속에서 실존한다. 인간도, 인간이 만든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존재는 언제나 가까스로 살아남으며, 바로 그 ‘가까스로’의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 사라짐은 자연스럽고 나타남은 기적처럼 어렵다. 세계는 명멸과 단속, 끊임없는 불안정 속에서 존재한다. 보기, 겪기, 휘말리기 라투르가 말하는 이론은 앎이 아니라 앎의 파괴에 더 가깝다. 새롭게 흔들린 감수성 속에서 나타나는 낯선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행위인 것이다. 김홍중이 강조하듯, 이론(theoria)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어원은 본래 ‘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라투르의 이론은 우리를 보게 하고, 본 것을 다르게 이야기하게 하며, 그런 이야기가 형성하는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를 창출한다. 이런 점에서 라투르 이론은 근본적으로 실천적이며 수행적이다. “이론의 반대말은 실천(praxis)이 아니라 맹목이다. 보지 못함이다. 라투르가 시도한 존재론적 전회는 ‘존재맹(存在盲)’, 즉 존재에 대한 무감각과 비식별을 교정 혹은 치유하는 실천적 의미를 함축한다.” 보는 것은 곧 실천이다. 보는 이의 겪음은 견딤, 기다림, 고통, 인내, 침묵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로부터 미래의 행위가 태어날 것이다. 김홍중은 역설한다. 행위의 참된 동력은 ‘안(내면)’이나 ‘위(구조)’가 아니라 ‘옆(다른 행위자)’에서 온다고. 옆의 누군가를 보며, 함께 겪으며 겪음 속에서 서로 연결되면서 온다고. 바이러스가 전염되듯, 소용돌이치며 몰려 온다고. 행위자가 된다는 것은 이 소용돌이에 기꺼이 휘말리는 것이다. “새로운 대안적 이야기는 이런 감각과 느낌의 쇄신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감각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그림 형제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휘말려야 한다고.” 그렇게 휘말린 이들이 서로의 취약성을 공유하며 연대할 때, 파국을 돌파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부서지고 파괴된 존재들의 동맹,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남는 생명체들의 종-횡단적 연대, 자본주의의 너머를 욕망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꿈의 흐름. 유쾌한 파국주의. 서구적 근대의 어둠을 넘어 다른 시대를 말하고, 조립하고, 노래하는 미래의 민중들, 생태 계급의 형성. 이것이 라투르가 말한 ‘생태 계급’의 미래다. 『가까스로-있음』은 그 미래를 위해 우리를 끈기 있게 휘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