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짓고 살았던 모든 집을 다루다
『한국주택 유전자』는 일제 강점기 관사에서부터 지금 한국의 모든 것이 얽혀 있는 대단지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지어졌던 거의 모든 주택을 1권 708쪽, 2권 654쪽, 도판 1150컷의 방대한 분량으로 샅샅이 살피는 책이다.
1권은 일제식민지 시기 지어진 ‘관사와 사택’, ‘부영주택’, ‘문화주택’, ‘아파-트’, ‘도시한옥’에서 시작해, 해방과 한국전쟁 혼란기에 각종 원조와 국채로 시급히 지어야 했던 ‘영단주택’, ‘DH주택’, ‘전재민·난민 주택’, ‘UNKRA주택·ICA주택·AID주택’, ‘재건주택과 희망주택’, ‘부흥주택’을 비롯해 외화벌이의 일환이었던 ‘외인주택’, 도시의 얼굴이고자 했던 ‘상가주택’을 아우른다. 대략 1920년대에서 1950년대 말에 해당하는 시기를 다룬다.
2권은 단지 아파트의 출발을 알리는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 보통 사람들의 꿈이었던 ‘국민주택’을 거쳐, 한국 주거사의 분수령이 된 ‘마포아파트’, 여러 방식으로 모색된 공공 공급 주택들인 ‘공영주택·민영주택·시영주택’ ‘시험주택’, ‘서민아파트’, ‘시민아파트’, 도심 재개발의 단초가 된 ‘상가아파트’ 도시와 농촌의 쌍생아였던 ‘새마을주택과 불란서주택’, 아파트의 고급화와 계층화를 이끌며 브랜드 아파트를 예견한 ‘맨션아파트’, ‘잠실주공아파트단지’를 다룬다. 여기에 ‘다세대주택과 다가구주택, 빌라와 맨션’을 더하며, 1960년 전후에서 최근에 이르는 한국인의 집을 모두 포섭한다.
1권이 식민지, 전쟁, 이촌향도 등으로 주택이 절대 부족했던 시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으로 지은 각종 주택을 소개한다면, 2권은 서울과 전국의 풍경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아파트가 한국인들의 절대 욕망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처음 공개되는 문헌과 사진, 도면
이 책에는 처음 공개되는 행정 및 외교 문서, 건축 도면과 사진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십 수 년 동안 국가기록원,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미국문서기록관리청를 비롯한 여러 기관과 단체의 문서고를 샅샅이 살펴 모은 파편들로 저자는 주택으로 살핀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해냈다. 전체 이미지의 80퍼센트 가량이 일반 단행본으로는 최초로 공개되기에 『한국주택 유전자』는 그 자체로 작은 아카이브이다.
현대사와 건축사의 공백을 메우다
그 동안 한국 현대 건축사는 김수근과 김중업 등 거장 건축가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에 대응하는 위생적이고 합리적인 주택의 대량공급이라는 현대 건축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보통 사람들의 공동주택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주택 유전자』는 이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시도다.
독재권력과 대항문화는 20세기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서술하는 주요한 구도다. 이 구도 속에서 군사정권이 주도한 주택 공급 정책과 그 여파는 비교적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 이르는 긴 억압적인 정권이 공급한 다양한 주택들의 면모를 구체적인 도면과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급격한 개발 과정에서 어떤 집들을 지었는지, 왜 그렇게밖에 지을 수 없었는지, 어떤 집들이 오래 살아남아 오늘날로 이어지는지를 하나하나 추적한다.
조선주택영단, 대한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 그리고 LH
세계에서 가장 많은 주택을 공급한 회사는 ‘대한주택공사’
세계에서 주택을 가장 많이 공급한 회사로 꼽히는 대한주택공사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1941년 설립한 조선주택영단을 전신으로 한다.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되었던 조선주택영단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으로 바뀌었다가, 5.16군사정변 후 1962년 대한주택공사로 거듭나 2009년 한국토지주택공사로 통합되어 해체된다.
대한주택공사는 벽돌조차 국내에서 생산하지 못했던 해방 직후는 물론이고 민간 건설회사가 시장을 주도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유일한 회사로, 아파트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주택을 지으며 전국의 풍경을 바꾸어 왔다. 그럼에도 대한주택공사가 남긴 물리적 흔적을 다룬 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대한주택공사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 어떤 집들을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손을 거쳐 지어왔는지 곳곳에서 서술하는 『한국주택 유전자』는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중 하나인 대한주택공사에 대한 소사이기도 하다.
『한국주택 유전자』가 최초로 발굴한 주제와 쟁점
이 책은 처음 발굴해 공개한 자료로 기존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한다. 주요한 쟁점 일부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한국인 최초의 현대 건축가 박길룡의 나진부영주택 설계 도면을 발굴, 단독주택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논의를 확장.
─ 오늘날 시영주택으로 부를 수 있는 부영주택을 공급하면서 일제는 일본인 주택에는 ‘보통주택’을, 조선인 주택에는 야만의 의미를 보태 ‘공동장옥’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밝힘.
─ ‘양옥’과 ‘아파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경성과 평양 등 대도시의 ‘문화주택’과 ‘아파-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자료 발굴을 통해 신당동 ‘앵구문화주택지’ 사진을 최초로 공개.
─ 평양역 앞 번화했던 도심지의 ‘동(東, 아즈마)아파트’의 위치와 사진을 발굴해 처음 공개.
─ 내자호텔로 널리 알려진 ‘내자동 미쿠니(三國)아파트’ 준공 직후 사진 및 전체 배치도를 최초 공개.
─ 채운장아파트와 회현동의 욱(旭)아파트, 해방 이후 미군 가족호텔로 사용했던 취산아파트의 개조 전 사진을 처음으로 발굴.
─ 중일전쟁 이후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청진과 대구에서 시도한 도심형 아파트의 평면도를 최초 공개.
─ 재건주택, 희망주택 등 한국전쟁 이후 원조자재와 기금으로 지어진 구휼 목적의 주택이 왜 9평으로 정해졌는지를 밝힐 수 있는 UNKRA 주택의 도면 원본을 발굴. ‘9평의 꿈’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밝힘.
─ 서울과 부산의 외인주택 조성 당시 (한국 정부를 대신한) 대한주택영단과 (미국 정부를 대신한) 주한 미국경제협조처(USOM)의 협력과 갈등을 관련 문건의 발굴과 해석을 통해 밝힘. 남산외인아파트 건설에 앞서 미국측과 사전 조율을 위해 작성한 남산외인촌 건설계획 조감도 등 일체의 도면을 최초로 공개
─ 쿠데타 주도 세력이 야심차게 밀어붙인 한국 최초의 단지식 아파트인 ‘마포주공아파트’가 미국측의 반대로 최초의 10층에서 6층으로 줄어든 과정의 전모를 밝힘. 특히 주한 미국경제협조처가 꼼꼼하게 지적한 마포아파트 반대 문건을 전문 번역해 수록. 당시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이 마포아파트를 통해 어떻게 불거졌는지 추적. 이 문건은 당시 한국 건축계의 기술 수준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단서.
─ 1962년 12월 1일 마포아파트 1차 준공식에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초대 총재가 주한 미국경제협조처의 킬런(Killen) 대표를 준공식에 초대했으나 실무자가 나서 이에 응하지 말 것을 권고한 뒤 다른 이가 대신 참석하게 한 이유를 밝히는 문건을 새롭게 발굴. 5·16 직후 한미관계를 드러내는 사건.
─ 10층으로 설계된 마포아파트 전체 설계도면 공개. 준공 직후 지하실에서 문을 연 생선가게와 양품점, 식당 등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진 자료를 처음 공개.
─ 서민들을 위한 주택으로 알려져 그 동안 거의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던 국민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을 비롯해 1960년대 대도시에 널리 보급되었던 다양한 유형의 서민아파트 등을 최초로 조명함.
새로운 연구와 창작을 기다리며
저자는 『한국주택 유전자』에서 무언가를 단정하기보다는 사료를 발굴해 정리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