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청준!
그 끝없는 무지렁이들의 이야기
“저 6.25전란의 한 자락에서부터 4?19와 5?16을 거쳐 80년 광주항쟁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그 지난한 역사의 격변기”(6쪽)를 “소설로서” “겪고 앓아온” 이청준의 신작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김윤식 선생이 “하늘과 땅이 하도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 씨 소설”(11쪽)임을 밝힌 것처럼, 한국문학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찾아 읽고 감당해야 할 소설이, 바로 미백(未白) 이청준의 소설이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에는 총3편의 중편(「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지하실」「이상한 선물」)과 총4편의 짧은 소설(「천년의 돛배」「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조물주의 그림」), 그리고 총4편의 에세이 소설(「귀항지 없는 항로」「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소설의 점괘(占卦)」「씌어지지 않은 인물들의 종주먹질」)이 실려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분량만큼이나, 이청준 소설이 복원하고 추구해온 세계가 전부 이 한 권의 소설집 안에 실려 있다. 삶에 대한 성찰,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 역사와 이념에 대한 성찰, 소설 쓰기에 대한 성찰, 소설쟁이로서의 성찰이 골고루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이청준 소설들을 읽다보면 “깨어진 영혼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어찌하랴. 배반이나 가해, 혹은 폭력의 허물을 또한 어찌하랴. 삶과 역사의 한을 도대체 어찌하랴”(우찬제)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이청준은 이번 소설집으로 “소설로서만 마침내 이루어낼 수 있는 그 경지”를 보여준다. 소설질 말고는 허튼 눈길조차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은 그. 이청준, 그의 이름은 이미 한국문단의 빛나는 족보이자 상징, 자존심이 되었다.
내가 소설질로 무엇을 해왔나?
1965년 『사상계』에 「퇴원」을 발표하면서, 질기고도 질긴 남도가락을 읊듯 바쳐온 소설질. “맘속 지님이 감당하기 무거워 누구와 그걸 나누거나 덜고 싶을 때” 해온 그 소설질은 이청준의 필생 화두였다. 이청준은 “어언 사십 년”에 이르는 “소설질 길”(297쪽)에서 한시도 “헤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늘의 영광을 증거하랴, 이 땅의 평화를 기구하랴, 아니면 참사랑의 섭리를 궁구(窮究)하랴, 한 시대의 정의를 선양하랴…… 이 소설질로 열어 나가고 싶은 문은 많았고, 이르고 싶은 꿈도 많았을 것이다.”(275쪽)
이청준의 헤맴은 “우리 삶의 씻김질에 다름 아니었”다. 『눈길』은 “막막하고 창연했던” 눈길 속을 헤매는 어머니를 위한 씻김질이었으며, 이번 소설집에 실린 「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는 “무덤가를 떠나지 못한 채 반세기를 추운 겨울 바람기 속에 발가벗고 서 있는 소녀”를 위한 씻김질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와 「지하실」「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는 역사에 운명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우리네 무지렁이들을 위한 씻김질이었다.
이청준의 소박한 사유들
이청준에게 있어서 에세이 소설은 무엇인가
이번 소설집이 특별한 것은 에세이 소설이 실려 있다는 데 있다. 이번 작품의 해설을 맡은 이윤옥 씨는 에세이 소설은 “에세이와 소설의 중간 단계”라고 정의한다. “이청준은 종종 인물들의 종주먹질을 먼저 에세이로 쓰고 에세이를 다시 에세이 소설, 소설로 쓴다”(310쪽). 에세이가 “소설에 비해 그 작자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소설과는 유다른 자연스런 삶의 생기와 소박한 사유의 은밀스런 성취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미 이청준은 밝힌 바 있다.
에세이「심지연」과 소설「이상한 선물」, 에세이「문학의 길」과 에세이 소설「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에세이「우리말의 고향」과 소설「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가 그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