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의 인간

필리프 아리에스 · 역사
11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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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화두를 주제로 삼은 필립 아리에스의 역작. 저자는 죽음에도 역사가 있어 매 시대마다 사람들은 죽음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또한 다르게 죽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 역시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료들을 통해 중세 초기에서부터 현대까지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고찰한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죽음은 다섯 가지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변천해왔다. 중세 초기 모든 사람들에게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죽음, 중세가 끝나갈 무렵 개인주의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죽음, 바로크 시대 죽음을 거부하면서도 시체의 관능성에 빠져들던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던 낭만주의 시대 타인의 죽음, 전 시대에 그토록 아름답던 죽음이 갑작스레 끔찍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역전된 오늘날의 죽음 등이다. 이렇게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이 다섯 가지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서 변천 가능한 패러다임일 뿐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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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역자

목차

1 횡와상의 시대 머리말 1부 우리는 모두 죽는다 1 인간과 친숙한 죽음 2 성인 곁 매장, 교회 내 매장 2부^ 자신의 죽음 3 죽음의 순간, 삶의 기억 4 내세에 대한 보증 5 횡와상, 기도상, 그리고 영혼 2 야성화된 죽음 3부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6 전환 7 바니타스 8 죽은 육신 9 살아 있는 죽은 자 4부 타인의 죽음 10 '아름다운 죽음'의 시대 11 묘지 방문 5부 역전된 죽음 12 역전된 죽음 결론 네 개의 주제에 의한 다섯 가지 변주 길들여진 죽음 | 자신의 죽음 | 먼죽금과 가까운 죽음 | 타인의 죽음 | 역전된 죽음 주 찾아보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 타인의 죽음 ―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욕구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죽음은 급기야 아름다운 것으로 격상된다. 19세기에 ‘타인’의 의미가 부상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즉 사랑하는 타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뀐 것이다. 아리에스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등장하는 프랑스 귀족 라 페로네 가족의 서신 모음과 개인 일기들을 통해 우리는 죽어가는 이의 아름다움, 죽음의 매혹 등을 보게 된다. 라 페로네 백작 부부의 자식 중 하나인 올가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데, “죽음은 늘 시와 사랑과 뒤섞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임종 전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침실은 예배당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천사는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살아 있던 동안에도 그만큼 아름다웠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브론테 가족의 경우,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 에어>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이러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폭풍의 언덕>에서 묘사된 에드거 린턴의 죽음 장면은 단순하지만 그 시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죽어가는 자의 침실은 번잡스런 방문객을 피해 좀더 호젓해지고, 죽음은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는 재회의 시간이 된다. 죽어가는 아버지 린턴이 자신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딸에게 곧 자신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며 그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놀라운 것일지라도 당시로서는 지극한 아버지의 사랑 표현일 따름이었다. 떠난 사람은 행복한 만남을 갖게 되지만 남는 사람은 이별을 견뎌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고, 삶은 온통 그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 에밀리 브론테는 그녀의 시에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찢겨”진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통과 그리움은 죽음에 대한 욕구를 낳게 된다. 죽음은 사랑하는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병적인 욕구는 “단순히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심층적인 상처이며, 그것도 한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시대적, 문화적 현상이었다.” “그 옛날 전통 사회에서는 감성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보다 다수의 집단 구성원들에게 분배”되면서 그 감성은 희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감성은 어느 누구와도 대치될 수 없으며 헤어지는 것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매우 특별한 극소수의 존재들에게 전적으로 집중된다.” “한 사람을 잃고 나면 온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죽은 이들 역시 아름다운 존재들이 된다. 이렇게 죽음은 아름다움이라는 가면 속으로 은폐되었다. ■ 역전된 죽음 ― 죽음을 볼 수 없게 된 시대 “20세기에 서구 사회 내에서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기술적인 진보 면에서 가장 앞선 일부 지역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죽음의 유형이 출현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죽음이 갑작스레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역전된 것이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며 죽음은 가리고 은폐해야 할 것이 된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을 숨기고 가리기 위한 숨바꼭질을 보게 된다. 45세의 평범한 중년 남자인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나 친구들은 모두 그의 병을 가벼운 것처럼 취급하며 죽음을 외면하고, 심지어 의사조차 이에 합류한다. “모두가 이 온당한 거짓말을 그만두고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질병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에게 끝까지 상태의 심각성을 은폐하기 위한 가족들의 거짓말과, 그런 가족들로 하여금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여기게끔 하기 위한 거짓말, 이 두 거짓말의 경연은 오늘날 우리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죽음이 단정치 못하고 추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플로베르가 죽어가는 보바리 부인의 구토와 혈농 등을 가차없이 그려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플로베르는 그녀의 비명, 경련, 이빨 부딪치는 소리, 벌어진 눈, 갈색 반점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혀 전체가 입술 밖으로 빠져나”오고, “제멋대로 굴러가는 두 눈은 마치 꺼져가는 두 개의 전구처럼 빛을 잃”는다. 이반 일리치의 치료 과정에서도 질병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라 페로네 가족의 아름다운 죽음과 확연히 다른 죽음이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이런 혐오감 때문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자의 추함으로 인해 죽음은 공개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그것이 주는 불쾌감을 참아낼 수 있는 소수의 가족들만이 임종을 지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임종 장소를 병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통증이나 질병과 더불어 일상적 삶의 일부였던 악취와 그러한 장면들을 이제는 우리의 감각이 견뎌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질병으로 인한 생리적 증상들이 일상성을 벗어나 위생, 의학, 도덕의 멸균 처리된 세계로 이송된다.” 이제 그 공개가 예의에 어긋난 것이 된 죽음은 사방이 막힌 병원의 병동에 격리되어 외부와 은폐된 채 이루어지며, 소독약의 냄새와 함께 흔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죽음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을 볼 수 없게 된 역전된 죽음의 시대,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이다. 죽음을 일상에서 멀리, 더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는 오늘날,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단지 그것을 애써 잊는 것으로써 회피하고자 한다. 아리에스는 “오늘날 진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문제시하고 이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까지 말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 가운데 어느 것도 옳고 그른 것은 없지만 애써 회피하면 할수록 죽음의 무게는 우리에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는 것, 오히려 죽음을 견디기 더 어렵게 된다는 것, 이는 아리에스가 굳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을 읽어가며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진실이다. ■ 우리는 모두 죽는다 ― 일상적이고 공개적이며 친숙한 죽음 중세 초기에 죽음은 일상적이고 공개적인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죽음은 그 목숨을 거두어갈 이에게 미리 예고를 해주었고,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감지한 임종자는 이러한 사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많은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원탁의 기사>나 <롤랑의 노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왕이나 기사들이 이런 죽음의 전형을 보여준다. <원탁의 기사>에서 “오 거룩하신 영주여, 그렇게 빨리 가시렵니까?”라는 물음에 가웨인(Gawain)은 “그래, 이틀을 못 넘길 것 같구나”라고 대답한다. 오늘날이라면 당연히 의사가 했을 말을 임종자 본인이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런 태도는 중세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중세에 “죽어가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리고 죽음을 준비했다.” 의사나 동료, 사제들보다도 “죽어가는 본인만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인해 묘지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나 마을 내부에 공존할 수 있었다. 단지 위치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묘지는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중세부터 17세기까지 묘지는 동시에 공공장소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온갖 놀이와 축제를 벌였으며, 종교적?사법적?정치적?상업적인 행사를 열었다. 1231년의 루앙 공의회에서는 “묘지나 성당에서 춤을 추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파리 시민들은 여전히 묘지에 모여들었다. “17~18세기에 생 인노상 묘지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아케이드였다. 할 일 없는 구경꾼들은 마치 팔레 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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