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20년의 도달점
‘모든 표현은 시대와 함께한다’는 것을 천명하며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변천을 예민하게 의식해온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등단 20년을 결산하여 선보인 열네 번째 소설 작품 『한 남자』가 현대문학에서 양윤옥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타인을 살았던 한 남자의 뒷모습을 통해 무거운 과거를 마주해가는 이들을 그린 이번 장편소설은 단 하나의 삶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간 존재의 한계 앞에서 ‘“나”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주제를 정치精緻하고 단정한 필치로 풀어놓는다.
1998년 『일식』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문단에 등장했던 대학생 ‘일본 현대문학의 기수’도 이제는 중견 작가, 불혹을 넘어선 나이가 되었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마침내 이루어낸 소설의 형태―『한 남자』는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동시에 일본서점대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문단과 독자 모두에게서 두루 호평받았다.
소설가로 등단한 지 올해로 20년이 되는데, 『한 남자』는 바로 지금의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해왔던 것처럼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삶과 죽음의 가치관을 파고들었지만, 가장 큰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것도 전작 『마티네의 끝에서』와는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이번에는 어느 쪽인가 하면 기도라는 주인공을 통해 아름다움보다는 인간적인 ‘선함’의 이상적인 모습을 모색해보았습니다.
‘한 남자’란 대체 누구인가. 왜 그의 존재가 중요한가. 모쪼록 찬찬히 이 이야기를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사랑했던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타인의 삶을 살았지만 타인의 죽음을 죽지 못한 남자에 대한 기록
변호사 기도 아키라는 옛 의뢰인 다케모토 리에에게서 ‘한 남자’에 대한 기묘한 상담을 받는다.
과거에 리에는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고 이혼했다. 연이어 부친마저 여읜 그녀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한 남자를 만나 가까스로 새로운 행복을 꿈꿀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안타까운 사고로 돌연 그가 세상을 뜨고, 슬픔을 떨칠 새도 없이 리에에게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덮쳐든다.
그의 이름, 그의 과거, 그의 모든 것은 완전히 낯선 누군가의 것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한 후 40대를 맞으면서 히라노는 ‘단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렸다고 한다. 이만하면 괜찮은가, 자신은 제대로 살고 있는가를 자문하다 보니 환경의 불리함 탓에 그런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사람에 생각이 가닿았고 거기서 타인을 살아가는 인물을 상상해냈다. “인생은 출발 시점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내가 만약 ‘이런 부모에게서는 절대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라고 할 만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어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살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그러한 지점에서 이야기가 커져갔습니다.”
『한 남자』의 화자 기도 아키라는 재일 교포 3세 변호사로, 그가 받은 의뢰는 죽은 남편의 ‘정체’를 조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남편이 실제로 누구였는지, 동시에 죽은 남편이 가장한 이가 누구였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또한 부부의 사랑이 그토록 절실했음에도 왜 남편이 진짜 이름을 버린 채 가짜 이름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과거가 비밀에 싸인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던 ‘한 남자’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제2, 제3의 신분을 바꾼 남자들이 나타나고, 단서를 흘리는 사기꾼 재소자의 존재는 소설에 미스터리의 색채를 드리운다. 기도는 ‘한 남자’의 정체를 파헤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되는데, ‘한 남자’를 뒤쫓는 걸음걸음 떠오르는 것은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타인으로 불린 죽은 남자나 남편을 잃은 아내가 아니라 한발 뒤에서 따라가는 변호사를 화자로 삼았다는 점이다. 히라노는 『한 남자』에서 ‘작품과 작가의 거리감’ ‘작품과 독자의 거리감’을 적절히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아들과 아버지에 남편마저 잃은 다니구치 리에나 타인의 껍질을 둘러쓸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신산한 삶을, 이전까지의 소설에서 그가 해왔던 대로 그 안에 매몰된 채 전달하면 독자들은 그들의 고통을 맨몸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거니와 히라노 자신이 전하고 싶었던 주제를 차마 보지 못해 외면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서序」를 작품 첫머리에 배치한 묘妙로써, ‘“한 남자”의 등을 응시하는 기도 변호사의 등을 응시하는 작가의 등을 응시하는 독자’라는 단계를 거친 스토리텔링이 완성된다.
“소설이나 영화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공감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서 감동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거지요.” 기도는 ‘한 남자’의 존재를 알아갈수록 오히려 본인을 알아가게 된다. 즉 ‘한 남자’가 거울이 되어 그가 드러나는 만큼 기도 역시 거기에 비치게 된다는 구조인데, 히라노는 이와 같이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이해에 이르고, 비로소 한 사람의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한 남자』를 통해 보여준다.
한 사람의 뒷모습에는 그의 삶이 반영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이건 누군가가 그 뒷모습을 찬찬히 응시해주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거기 담긴 삶의 궤적을 헤아리고 공감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얘기가 성립한다. 그리고 다시 그 사람의 등을 또 다른 누군가가 찬찬히 바라보고 헤아리고 공감한다. 이 소설에는 그렇게 공감하는 사람의 연쇄가 그려져 있다. 한 남자가 남긴 미스터리한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각자의 처지에서 무엇을 감지하고 고뇌하여 결국 어떤 방식으로 공감하는지, 인간 존재에 대한 천착과 사회적 화두가 줄줄이 교차하면서 시종 흥미롭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옮긴이 양윤옥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지만 과거-현재-미래는 상호 간에 통하기에, 과거는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할 수 있다고 『한 남자』는 이야기한다. 현대인의 생의 애로隘路와 희망을 철학적인 함축과 섬세함으로 빚어낸 이 소설에서, 과거에 상처 입은 어른들과 미래를 살아가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상냥하다. 히라노 문학 제4기를 상징하는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