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나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을까
아름답고 날카롭게 산란하는 사랑의 빛깔들
《아몬드》 작가 손원평 신작 장편소설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공감하지 못하는 현실을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내는 작가 손원평의 신작 장편소설 《프리즘》이 출간되었다. 지난 8월 온라인 서점 yes24 선정 독자가 뽑은 ‘2020년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위. 올해 일본서점대상 번역소설부문 수상, 올 상반기 미국 아마존 에디터가 뽑은 최고의 책 TOP 20. 알라딘 선정 한국문학을 이끌어갈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 손원평. 올 한해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가 이번에 ‘사랑’에 관한 다양한 빛깔을 꺼내들며 다시 우리 앞에 나섰다.
신작 장편소설 《프리즘》은 네 남녀의 사랑에 대해, 만남과 이별의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마음’을 다양한 빛깔로 비추어가는 이야기이다. 타인과의 관계맺음이 불러오는 다양한 성장통에 천착했던 작가는 《프리즘》을 통해 사랑과 연애라는 어른들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 얼마나 반추할 수 있는지, 더불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사랑이 퇴색되어버린 남자 도원, 상처와 후회를 억지로 견뎌내는 재인, 아프고 후회해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예진, 단 한 사람도 마음 안으로 들이지 못하는 호계. 이 네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움직여지는 그 마음의 각각의 지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작가 손원평의 잔잔한 톤과 함께 밀도 높은 문장으로 그려진다.
누군가 다가온다면 나는 이렇게 반짝일 수 있을까
소설은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두 사람 예진과 도원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둘은 점심시간이 되면 일터를 벗어나 누군가와 마주칠 염려 없는, 걸터앉기 좋은 자리가 있는 빈 건물 1층에서 나란히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예진’. 영화 후시녹음 업체에서 일하는 ‘도원’. 두 사람은 딱 적당한 거리만큼의 간격으로 나란히 앉아 싱거운 대화를 나누며 거리의 소음과 따사로운 햇살을 맞는다. 짤막한 대화가 전부지만 두어 번은 거리를 같이 산책한 적도 있다. 어느 순간 두 사람 중 누군가 한 발짝 다가오면 연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원은 지금의 이 간격이 좋다. 지금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평행선. 그게 도원이 생각하는 예진과의 마음의 거리다.
도원의 커피에선 늘 김이 난다. 모락모락.
“안 뜨거워요?”
“뜨겁죠.”
“안 더워요?”
“아. 조금?”
정말 싱겁기 짝이 없는 대화다. 대화만 놓고 보면 재미도, 매력도, 아무런 얘깃거리도 없다. 하지만 도원이 싱긋 웃자 예진의` 마음은 흔들리고 만다.
―본문 15쪽
호계는 재인의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다. 빵을 굽는 재인을 보조하며 진열과 청소, 계산을 돕는다. 많은 대화 없이도 둘의 호흡은 잘 맞는다. 하지만 호계는 베이커리의 따듯한 안온함과는 달리 전혀 다른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산 지 오래다. 달콤한 빵 냄새를 맡을 때마다 이건 가짜다, 세상의 진짜는 아름다운 유혹 속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인 또한 가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많다. 그녀는 얼마 전 남편과 이혼한 상태.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편과 같은 지붕 아래 살지 않게 되자 그들은 더 자주 만난다. 미련 때문이 아니다. 재인에게는 무언가를 끊어내는 게 어렵다. 자기 스스로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어내기가 어렵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점이 좋을까. 모든 비극과 불행의 전 단계로 가려면. 재인은 습관처럼 가정해보지만, 그러다 보면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만다. 오늘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조금 전 보았던 낯익은 듯한 옆모습. 아까 본 사람이 그였다면.
―본문 48쪽
예진이 도원에게 향하는 마음은 점점 짙어진다. 예진은 이 상태가 싫지 않다. 무언가 시작되기 직전, 설레는 마음의 크기가 가장 클 때, 지금 이 마음의 상태가 싫지 않다. 그것이 연애의 감정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분명히 현재에만 머무르고 싶지도 않다. 도원에 대한 마음은 점점 짙어지지만 그와의 간격은 더 이상 좁혀지지가 않는다. 한편, 예진은 우연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오픈채팅방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 정모에서 호계를 만나게 된다. 호계는 차가운 냉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예진. 외로움의 온도가 느껴지는 호계에게 호기심을 갖고 말을 걸어보지만 그는 차갑기만 하다. 소란한 정모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집으로 향하는데 우연히 같은 지하철 안. 예진은 실수로 노트를 떨어뜨린 채 떠나고 호계는 그녀의 노트를 줍는다. 무언가 복잡하고 귀찮은 일에 얽힐 거라는 예감이 밀려왔으나, 이상하게도 호계의 마음 한쪽에서는 예진의 노트를, 그녀를 외면하지 말라고 부추긴다.
사람과 사람이, 누군가와 누군가가 만났을 때 생기는 공기의 진동이 궁금했을 뿐이다. 호계는 그런 감정을 읽는 데엔 능숙했지만 경험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부터 귀찮은 고민이 호계를 맴돌고 있다. 예진을 알게 되고부터 (…)
나만 빼고 다 사랑인가.
―본문 124쪽
도원은 연극 티켓이 남는다며 예진에게 친구를 데리고 와도 좋다고 말한다. 찜찜한 말이었지만 그때에는 별생각 없이 남은 티켓을 호계에게 전하는 예진. 예진은 지금 그 일이 후회스럽다. 그때 그냥 둘이 봐도 좋다고 말할 것을. 그날을 기점으로 모든 게 달라졌으니 말이다. 호계는 재인에게 남은 티켓으로 연극 공연을 보자 말했고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된 네 사람. 예진은 그날 이후로 달라진 도원을 실감하는 중이다. 도원과 재인의 미묘한 기류의 변화. 연극 공연이 끝나고 팔을 뻗어 아무렇지 않게 재인의 어깨를 툭툭 쳐 인사를 나누는 도원. 도원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미소로 화답하는 재인. 예진은 끼어들 틈 없이 두 사람만이 진공하는 그 짧은 찰나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인연의 시간을 알아챘다.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느껴지는 두 사람 간의 공기. 떨어져 있던 긴 시간을 통째로 압축한 듯 슬픈 환희와 같은 분위기를 예진은 감지한 것이었다. 대체 그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인 거지? 예진은 머릿속에는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으나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자기가 싫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계절에 우리는 가장 아름답다
이 소설은 네 사람이 사랑으로 얽힌 관계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에 사랑이 불러온 낯선 이와의 연결되지 않은 관계, 뜻밖에 다시 재회한 그 만남과 이별에서 세심한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고 실타래를 풀어갈 뿐이다. 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을 통과하며 자신을 확장해가고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미는 작은 움직임을 관찰하며 그로 인해 자기 확장을 스스로 느껴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과 효과라고 손원평은 네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인연과 우연이 반복되는 사랑은 언제고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불타오르고 희미해져 꺼진다는 것. 그리고 또다시 다른 얼굴로 시작된다는 것. 그 끊임없는 사이클을 살아 있는 내내 오가는 사랑. 어른들은 그 사랑이 자기 내면을 반추하게끔 하며 성장의 발판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아름답게 혹은 날카롭게 산란하는 사랑의 빛깔들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는 사랑 그 후의 성장.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무늬를 남기는지를, 되풀이되는 사랑의 또 다른 성장에 대해 깨달아갈 때쯤 우리는 각자의 기억 속에서 머무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그 ‘사랑’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