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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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_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 현직 부장판사, 한국사회를 말하다 ‘가능한 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그런 한도 내에서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는 바람은 그리 커다란 욕망이 아닐 것이나, 이만큼을 바라기에도 한국사회는 그리 녹록지 않다.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오래된 문화 풍토는 늘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도록 하면서도 눈치껏 튀지 않고 적당히 살기를 강요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사회생활’이라 여긴다. 조직 또는 관계로 얽히고설킨 것이기에 그런 풍토로부터 웬만해서는 쉽사리 벗어나기조차 어렵다. 그러하기에 한국에서 ‘개인’으로 살아가기란 어렵고 외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현직 부장판사인 저자가 문제적이라 진단한 한국사회의 국가주의적, 집단주의적 사회 문화를 때론 신랄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그리면서, 이를 극복할 방법에 대해 탐색해본다. 학벌, 직장, 직위, 사는 동네, 차종, 애들 성적…… 삶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남들 눈에 띄는 외관적 지표로 일렬 줄 세우기를 하는 수직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상 한 명도 있을 수 없다. 그 모든 경쟁에서 모두 전국 일등을 하기 전까지는 히딩크 감독 말처럼 늘 ‘아직 배가 고플’ 테니 말이다.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과 초조함, 낙오에 대한 공포 속에 사는 사회다. _29쪽 대한민국에서 개인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 조직과 서열이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자칫 이기주의로 오해받기 일쑤다. 튀어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에서 지위재는 무척이나 중요해서 과시하는 문화가 팽배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전전긍긍한다. 그러하기에 남들이 뭐라 해도 상관없이 개성대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의 삶은 이해받기 어렵다. 행복의 기준도 획일화되어 있어, ‘남들 다 하는 대로’ 갖추고 살아야 행복한 것이라 여긴다. 아등바등 경쟁해야 ‘정상’이고 승진하고 출세해야 인정받는다. 그런데 과연 한국인은 정말로 행복한가? 한국사회는 이런 사회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 급인지’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다. 나이 오십대 중년들의 사회에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모임에 나타나는 것은 메시지가 다른 것이다. 고위직 판사들이 기사 딸린 차로 나타나다가 어느 날부터 낡은 자가용을 자가운전하여 나타나기 시작하면 청렴한 집단이라고 좋은 평가를 받는 플러스 요인보다 사회적 위상이 예전보다 못한 집단으로 평가받는 마이너스 요인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외관이 실질을 좌우하는 사회다. _30~31쪽 원래 행복의 원천이어야 할 인간관계가 집단주의사회에서는 그 관계의 속성 때문에 오히려 불행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맛있는 음식도 내가 원치 않을 때 강제로 먹으면 배탈이 나듯, 타인과의 관계가 나의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되고, 의무와 복종의 위계로 짜이는데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 될 리 없다. 갑을관계, 경쟁관계, 상명하복관계, 나를 평가하고 지배하는 관계, 내가 일방적으로 순종하고 모셔야 하는 관계에 있는 인간들이 과연 나에게 유용한 생존의 도구이기는 할까? 생존의 위협에 가깝지 않을까? _56~5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과 타협하고 연대해야 하는가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기반에는 근대적인 의미의 ‘개인’이 있다. 이때의 개인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합리적으로 수행하는 자이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도 역시 나와 똑같이 그러함을 인정한다. 다만 개인주의자는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인식하기에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뿐이며, 서로의 입장과 영역을 존중할 줄 안다. 그러나 군대 문화, 가족주의 문화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개인주의자는 별종 취급을 받거나, 때로는 사회적 질타를 받기도 한다. 집단에서 요구하는 것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하지 못할 경우, 혹은 집단의 불합리성을 고발하고자 할 경우 개인주의자는 집단과 ‘불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개인’은 억압당하고 그래서 불행하다. 특히 한국인은, 내가 너무 별난 걸까 하는 생각에 속내를 드러내지 않거나 자신의 욕망을 제풀에 꺾어버리는 경험을 살면서 수없이 겪는다. 그리고 이는 거꾸로 건강하지 못한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인이 된다.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_24~25쪽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를 꿈꾸다 진영논리만이 확연한 정치, 과잉된 교육열과 경쟁 그리고 공고한 학벌사회, 서열화된 행복의 기준 같은 고질적인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바꿔나가기 위해서도, 우선 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하고 타협하고 연대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각자도생의 저성장시대를 견뎌내기 위해서, 개별적이고 소소하고 다양한 즐거움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부장판사가 ‘글쓰기’를 단지 그냥 즐거워서 한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런 분들은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이렇게 물어본다. “그런데, 이름 알려서 나중에 정치를 하려는 생각인 거지?” 그럴 때면 참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 왜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직업이나 성취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그 이름도 위대하신 ‘정치인’이라는 최종 포식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는 점이다. (...) 이때의 정치란 시민적 의무가 아니라 개인적 출세의 다른 말일 뿐이다. 권력에 부와 명예, 쾌락이 당연히 따르는 걸 지켜봐온 현대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_60~61쪽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_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