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간은 문학을 통해 잔인해지지 않을 수 있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쓴
미국문학 최고의 단편소설
책봇에디스코의 고전 명작 시리즈 첫 번째 책, 『바틀비, 월 스트리트의 한 필경사 이야기』(이하 『바틀비』)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미국이 낳은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허먼 멜빌(1819~1891)의 대표 단편소설이다. 발표 당시에는 평단과 독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현재는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인간 존재와 관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바틀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롭게 읽히는 중이다. 그것이야말로 고전이 가진 힘일 것이다.
책봇에디스코의 『바틀비』에는 일러스트와 영어 원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지금,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인간이 인간을, 다른 존재를 대하는 태도는 그 시대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요즘 우리는 매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아동학대, 성 착취, 학교 폭력, 동물학대, 살인… 등 끔찍하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건들과 마주한다. 자극적인 뉴스의 홍수 속에서 끔찍한 사건이 주는 정신적 충격도 점점 무뎌지고, 이제 우리는 그런 이야기마저 그저 뉴스거리로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잔인한 시대를 가장 잔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중 하나가 바로 고전 문학 읽기일 것이다. 고전 문학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간 존재와 관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우리가 멈춰 선 자리를 돌아보게 하고, 나아갈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고전 읽기는 인간 내면의 변화 가능성을 촉발한다.
지금 내가 선 자리를 알기 위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모든 것을 거부하는 인간, 바틀비
“‘인간’이라 규정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문화적 행위를 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획득하는 존재이다. 즉,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특정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와 사회를 지탱하는 행위를 해야만 한다. 자본과 법률이 인간의 삶과 행위를 구속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과 법의 논리에 따라 인간의 행위가 결정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구나 범법자가 된다.
『바틀비』는 1853년, 미국의 월 스트리트가 전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절, 월 스트리트에 자리 잡은 한 법률사무소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화자는 ‘이상한 필경사’ 바틀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물질적 · 정신적으로 매우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처음으로 우울하고 혼란스럽게 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바틀비이다.
소설은 바틀비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를 설명할 수 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경사라는 어엿한 직업을 가졌음에도, 그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며, 화자가 직접 본 것을 제외하고는 모호한 기록만이 남은 자이다. 즉, 그는 ‘역사가 없는 자’이며,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탈각된 존재이다. 아무도 그를 증언해 주지 않으며, 그를 증언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
바틀비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피고용자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필경하는 일뿐만 아니라, 법에 의거해 남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도움조차 거부한 바틀비는 결국 ‘방랑죄’로 수감된다. 감옥에서도 그는 인간의 기본적 행위인 음식 섭취를 거부한다.
노동, 음식 섭취, 관계 맺기 등 우리가 관습적 · 상식적으로 ‘인간’이라 규정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한 바틀비. 그럼에도 여전히, 바틀비는 인간이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고, 밥을 먹지 않거나, 자신이 하던 일을 거부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공동체가 요구하는 질서를 거부하는 바틀비 같은 인간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거부는 그를 범법자로 만들었다. 질서를 거부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그는 ‘배달 불능’으로 분류되어 소각(죽게)된 것이다.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기록, 문학
“인간은 문학을 통해 잔인해지지 않을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자신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며 산다. 먹고 사는 문제, 경제 활동의 여부, 그 활동이 발생시키는 부의 확장 등, 현재 우리 문화와 질서는 그 영역을 조금만 벗어나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분류한다. 그렇게 분류되는 인간은 ‘배달 불능’으로 분류되어 바틀비처럼 소각될 것이다.
바틀비 같은 존재, 즉 역사도 없고 자신의 자리가 없는 사람을 위해 기록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없어도 밥을 먹고 삶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러나 문학은 있어야 한다. 왜일까?
화자는 바틀비 앞에서 멈칫했고, 뒤돌아보고, 찾아가고, 확인한다. 그가 멈칫하는 순간이, 문학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며 심지어 인간적인 활동을 거부하더라도 그가 인간임을 알아차릴 때, 인간은 인간을 존중할 수 있고, 잔인해지지 않을 수 있다. 그 기본적인 태도가 인간의 문화와 사회의 질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변화를 위해서는 ‘쓸모없는’ 인간 앞에서 윤리적인 태도가, 나아가 기록 없는 사람을 기록으로 남기는 문학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바틀비, 월 스트리트의 한 필경사 이야기』의 문학적 의의일 것이다.
인간적인 활동을 거부하고, 쓸모의 영역을 거부하고, 심지어 살아있는 것조차를 거부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인간임을 기록하는 것과, 우리가 바틀비와 같은 존재 앞에서 ‘멈칫’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문화와 공동체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윤리적 책임감의 시작이 아닐까.
내 생애 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는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전에 나는 달콤한 슬픔 정도밖에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이 나를 저항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이끌고 있다. 형제의 비애!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