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뒤섞인 시간과 어둠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무수한 과거의 형상들, 희미해진 몸들이 어두운 온기를 나누는 밤과 꿈의 숲 임원묵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개와 늑대와 도플갱어 숲』이 민음의 시 324번으로 출간되었다. 임원묵 시인은 상실 이후의 사랑을 그리는 “간절함과 미학적인 것의 결속”이자 “기억의 현상학”이라는 평으로 2022년 《시작》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임원묵의 시는 기억이 가진 양가적인 힘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억은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을 만나게 하고, 이별과 사랑,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 바로 그 힘으로 임원묵의 시는 양립할 수 없는 가능성들을 동시에 탐색하고 사방으로 팽창해 나간다. ‘작은 점’으로부터 시작된 우주처럼, 『개와 늑대와 도플갱어 숲』은 상실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된 ‘기억의 우주’다. 이 우주에서 영원불변한 것은 빛이 아니라 사랑이다. 어떤 힘에도 변질되지 않기에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기준이 된 빛처럼, 이곳에서는 사랑이 절대적 기준이다. 빛이 흩어지고 시간이 뒤섞이자 깊은 어둠을 타고 무수한 과거가 현재로 온다. 탄생과 죽음, 멸종과 진화가 나란히 놓이는 이 우주에는 소멸이 없다. 새와 공룡은 개와 늑대처럼 공존한다. 나와 똑같은 이를 만나면 죽음이 찾아온다는 도플갱어의 저주도 힘을 잃는다. 만날 수 없던 나와 나, 너와 너가 도처에서 마주치고, 똑같이 생긴 얼굴들에서 서로 다른 표정과 감정 들이 쏟아진다. 이곳에서 나와 너 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멀어지는 동시에 껴안으며 영원히 함께 있다. ■ 너를 두고 온 미래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슬프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사랑 대신 용서를 구하기로 한 셈이지요 ― 「삼월」에서 임원묵의 시가 시작되는 구심점, 상실의 기억에는 사랑과 죄책감이 언제나 함께 깃들어 있다. 기억을 끝없이 돌이키며 상실이 없는 미래를 찾는 임원묵의 화자는 이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사랑의 지속과 죄의 용서를 동시에 갈구한다. 그러나 곧 어떤 미래에서도 사랑과 용서는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억이 비추는 것은 과거뿐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통해 사랑과 죄가 선명해지는 만큼, 미래는 멀어진다. 과거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한 죄의 용서는 먼 미래의 일이 된다. 그렇게 임원묵의 화자는 “사랑 대신 용서를” 구하는 방식으로 먼 미래에도 ‘너’를 둔다. 미래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사랑과 죄가 없는 무구한 어둠이지만, 그곳에 ‘너’를 둔 순간 미래도 ‘나’의 사랑과 죄가 빛나는 기억이 된다. ‘나’를 용서하지 않는 ‘너’는 ‘나’의 모든 미래에 있다. 이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미래를 기다린다. 짙은 어둠을 가로질러 네가 던진 돌처럼 미래가 내게 날아들기를. ■ 깊은 밤의 숲 여긴 길의 끝이나 세계의 종말처럼 공허하지 않습니다. 불빛이 없어도 모종의 사건은 계속 벌어지고, 나는 더 걸을 수 있어요. ― 「열 번째 겨울, 바닷마을에서」에서 『개와 늑대와 도플갱어 숲』에서의 밤은 언제나 “밤이 아닌 것들”과 섞여서 온다. 여섯 개의 다리로 어둠을 헤아리는 곤충, 팔을 물어뜯는 맹수들, 도로 위의 고양이, 쓰레기봉투 앞에서 낑낑거리는 개. 소름 끼치고, 섬뜩하고, 아프고, 애처롭게, 그렇게 밤은 살아 있는 채로 ‘나’에게 달려든다. 임원묵의 인물들은 어둠 속에 다만 머물지 않는다. 어둠을 헤아리거나 더듬어 감촉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가 죽고, 서로의 몸을 바꾸며 경계를 흐리다가 이윽고 어둠이 된다. 『개와 늑대와 도플갱어 숲』은 시공간의 한계가 없는 깊은 어둠, 밤과 꿈의 숲이다. 끝내 의심했던 ‘멸종’과 애써 믿었던 ‘진화’, 네가 없는 ‘미래’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제 우리는 이 어둠이 되어, 어둠의 몸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