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망각은 미래의 더 풍부한 가능성의 망실로 이어진다.
《붉은 시대》는 이제라도 이런 수렁에서 빠져나오라고 다그치는 나팔 소리다.” _장석준, 사회학자
독립을 넘어 쇄신을 꿈꾼
1919~1945,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유토피아
광복절 80주년을 맞는 올해는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창당 이후 공산당은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항일투쟁 현장에서 늘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일제강점기에 형무소를 드나든 이들 중 다수는 공산당원이거나 그 지지자 또는 공산당 재건운동 참여자였다.”(342쪽, 추천의 말) 나라를 되찾는 것을 넘어 더 나은 사회를 꿈꾼 이들은 ‘반제국주의, 소수민족 해방, 최저임금 보장, 산업재해 보상, 노동자의 경영 참여, 파업권 보장, 토지개혁, 유급 출산 휴가’ 등 급진적인 의제를 거침없이 내세우며 가장 억압받은 이들이 주체가 되는 사회를 꿈꾸고 주장했다. 이 책 1장에서 드러나듯 당시 항일투쟁의 성격이 백정, 기생, 여성, 청소년까지를 포함하는 유례없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일 수 있었던 까닭이자, 중국혁명에 대한 연대,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한 반기,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소수민족 해방 지지 등 초국경적 연대 활동으로 뻗어갈 수 있던 이유다.
1945년 해방 이후 이념 갈등과 체제 경쟁의 영향으로 남북 모두 군사적 대치와 상호 경쟁적인 개발 권위주의 정치로 나아가면서 조선 마르크스주의운동의 역사는 의도적‧강제적으로 망각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의 유산은 근현대의 초석이 되어 현재까지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이후 우익으로 전향한 유진오가 초안을 작성한 대한민국 헌법은 그 시작부터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의 조화”(346쪽)를 기본 정신으로 삼았으며, “우파가 우상시하는 박정희의 경제성장 위업”(348쪽) 또한 사회주의 계획경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복지국가’ 개념의 구상은 물론, 노동3권의 보장과 8시간 노동제, 근로 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을 대대적으로 이끈 1987년 노동자대투쟁 또한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와 그 유산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복원하는 이 책은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미래의 더 풍부한 가능성”(348쪽)을 꿈꾸기 위해 “대한민국 정신사의 잃어버린 고리”(346쪽)를 복원하는 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전 지구적 맥락에서 전개된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전략과 실천
기존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서술과 이 책의 가장 큰 차이는, 조선 마르크스주의운동을 당대 유럽, 러시아, 일본, 중국 등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의 붉은 시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의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대공황, 침략 전쟁의 발발, 빈곤과 차별, 불평등의 심화 등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에 관한 코민테른의 파국적 예언이 실현되는 듯 보였던 “비상사태” 한가운데서 조선의 위기 또한 심화되었고, 여기에 식민 지배를 받는 상황까지 더해져 다중의 위기를 겪는 와중이었다.
“왜 이런 일이 1919년에 일어났는가? 그 시점의 국내 사건들은 거대한 전 지구적 흐름과 중첩되어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1910년 일본의 조선 식민화 이후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는데, 농민은 토지 소작 조건의 악화를 원망했고, 일부 지주와 부유한 상인도 식민 당국이 산업 발전을 제한하자 경악했다. 개항 이후 등장한 도시 중간계급은 진보적·근대적 발전의 부재에 절망했다. 게다가 식민 행정부가 공식화한 조선인의 차별은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만드는 기막힌 장치였다.
한편, 전 지구적으로 1919년은 반란의 해였다. 1968년보다도 급진적이었다. 1968년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반란들’이 이윤을 위한 생산, 자본축적, 공적 영역에서 대량소비 논리를 상징적으로 공격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존재 자체를 진정으로 위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9년에는 세계대전과 스페인독감 팬데믹 이후에, 그리고 전후 경제 불황 와중에 진정으로 세계체제가 최종적으로 폭발 직전에 있다는 뚜렷한 느낌이 존재했다.” _<서론> 중에서
다중의 모순과 억압 속에서 조선의 좌파들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최신의 논의들을 참고하고, 코민테른의 이데올로기와 지침을 당 강령에 반영하며, 타국의 반제국주의‧계급투쟁의 영향을 받는 등 그들의 투쟁을 국제적‧국제주의적 맥락 안에 놓으면서도 식민지 조선의 고유한 현실을 중요하게 염두에 두며 ‘조선의 해방’을 위한 전략을 벼리고 ‘해방 조선’에 대한 기대와 상상을 펼쳐 나갔다. 2장에서는 조선의 위기에 대한 각기 다른 입장과 전략으로 단일하기보다는 다단했던 1920~30년대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양상을 조명한다. 이 시기 공산주의 그룹 분파 갈등의 주요 골자는 그룹의 지도부 대부분이 프티부르주아계급 출신 지식인이라는 한계와 계급투쟁보다 반제국주의 투쟁을 우선하는 (공산계‧비공산계) 민족주의 그룹과의 관계 맺기에 관한 것이었다. 정통 공산주의 그룹의 관점에서는 조직 내 계급적 위계와 민족혁명 너머를 상대적으로 덜 고려하는 운동의 방향성은 ‘계급혁명’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는 데 어려움을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렇지만 대중투쟁의 기반이 계몽을 거치며 아직 형성 중에 있고, 반제투쟁이 계급투쟁에 비해 광범한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 대부분은 어느 정도의 긴장 속에서 이 모순들을 수용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대 코민테른은 물론, 후대 역사가들 역시 이 시기의 분파주의를 공산주의 대의의 실천을 가로막는 부정적 요인으로 해석했지만, 저자는 이러한 분파 간 경쟁으로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전술적 성숙이 크게 가속화”(127쪽)되었다고 재해석한다. 각자의 입장을 선명히 드러내면서도 타협과 교섭의 기회마다 치열한 고민을 이어간 당시의 역사는 이견을 가진 세력이 어떤 식으로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참조할 이야기를 전해준다.
3장에서는 조선 공산주의 당 강령을 시기적으로 살펴본다. 강령이란 당 차원에서 제시하는 조선의 혁명적 미래상이자 대중에게 호소할 표어이기도 했기에, 당은 강령을 통해 식민지 사회 다양한 하위 계층의 “근대적‧민주적 요구”를 종합하고, 이를 “보편주의적‧탈민족주의적 세계관”과 조화시키며, “주류 조선 사회의 보수적 분자들을 밀어내”며 “광범한 반식민 동맹”(133쪽)으로 나아갈 의도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조선공산당 17대 슬로건에는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과 실업수당, 파업권 보장, 출산수당과 여성의 모성 휴가 보장, 여성과 아동의 위험한 노동 금지, 의무적 무상교육과 직업교육, 노령연금 지급(남성은 60세, 여성은 55세 이후)’ ‘모든 지주의 토지‧일본 국유지 몰수 후 농민에게 재분배’ 등 지금의 관점에서도 급진적인 의제들이 포함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이러한 강령은 공산주의보다 민족주의적 경향이 우세했던 신간회 같은 항일 단체에도 영향을 미쳐, 이들로 하여금 ‘성평등, 성매매 철폐, 형무소 재소자에게 독서와 통신의 자유 허용’ 의제 지지 선언을 하게 하기도 했다.
‘조선’ ‘조선 민족’ ‘조선인다움’을 둘러싼
날카롭고 치열한 논쟁
사회적 결속의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방식이 대중적 호응을 얻었던 가운데, 4장과 5장에서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당대 공산주의자들의 논의에 초점을 맞춘다. 4장에서는 ‘단군 신화’와 ‘혈통주의’를 매개로 점차 본질화‧국수주의화되어가던 ‘민족’ ‘민족사’ 담론을 비판하고, 극우 민족주의를 흡수한 자본주의가 결국 ‘파시즘’으로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내다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의 사상을 다룬다. 조선에서의 극우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