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먹지만 잘 몰랐던 코리안 소울푸드 ‘김치’의 속사정.
(전) 대기업 카피라이터, (현) 김치 공장 새내기가 쓴
김치 공장의 요절복통 근무 일지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우리의 귓전을 때리는 이 〈김치 주제가〉의 가사처럼, 김치 없는 한국인의 밥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배추김치는 물론이거니와 계절마다 열무김치, 오이소박이, 파김치, 총각김치, 종류가 다채롭게 등장하는 우리네 식탁이지만… 정작 김치를 만드는 이들의 하루를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여기, 대기업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10년 근속 포상을 눈앞에 두고, 김치 공장 새내기를 자처한 이가 있다. 대체로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에서 궁둥이 붙일 틈 없는 현장직으로의 전환은, 게다가 유망한 것도 아닌 케케묵은 산업에 뛰어든 그의 일상은 그야말로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을 방불케 한다. 구불구불 숲길을 지나 출근한 김치 공장 사람들은 세척실로 쏟아져 나오는 배추를 건져 종일 서서 속을 넣고, 하루에 오이만 3천 개를 썰다가 손가락을 못 펴는 지경에 이르고, 1년 전에 구매한 김치가 이상하다며 항의하는 황당한 고객을 응대하며, 밀려드는 일을 하다가도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홈쇼핑 방송을 위해 달려가는…. 『김치 공장 블루스』는 정신없이 굴러가는 하루에도 자기만 알기 아까운 순간들을 포착하고, 순간마다 배움의 기회로 삼는 남다른 근성을 지닌 저자가 쓴 김치 공장살이의 기록이다. 고춧가루 팍팍 무친 듯 눈물 나게 맵다가도, 절인 배추 한 쪽 베어 문 듯 짭조름하고, 동치미 국물 들이켠 듯 속 시원한 김치 공장의 희로애락이 담겼다.
한편, 이 책은 저자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먼 타지에서도 자부심을 지키며 일하는 외국인 친구들, 오랜 시간 공장에 몸 바쳐 온 선배들, 자신의 아들딸에게 자랑스러운 엄마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보내며, 저자는 그들과 연대하기를 굳게 다짐한다.
유일무이한 ‘김치’ 에세이의 등장
“매일 김치를 담그며 배우는 일과 인생의 감칠맛”
삼시세끼 입으로는 즐겨도, 읽을 수는 없었던 김치의 세계. 비로소 유일무이 김치 에세이가 탄생했다. 여태 김치에 관한 에세이가 전무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라면에 배추김치, 칼국수에 겉절이, 고구마에 열무김치, 전 국민이 (김)치믈리에를 자처하는가 하면, 익은 정도에 따라, 지역마다 다른 양념 맛에 따라 김치 취향을 촘촘히 나누던 우리인데 말이다.
매일 김치를 담그는 이의 시선으로 쓰인 이 책은, 그동안 봉인되어 있던 김치 공장의 이야기, 그 안에서 김치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분주하게 일하는 틈에도 공장의 소중한 일상을 포착해 맛깔나게 풀어냈다. 그의 시선을 통해 김치 공장이라는 친숙한 듯 낯선 풍경과 그곳에서 분주하게 몸을 놀리는 사람들의 하루를 엿볼 수 있다. 시종 유쾌하게 전개되지만, 코로나 시기와 공장 사람만이 공유하는 비애와 같은, 눈물 없이 못 듣는 짠한 에피소드도 담겨서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게 된다.
이 책이 주는 재미의 큰 몫은 공장 사람들이 해낸다. 공장에는 연령대도, 국적도 다채로운 사람들이 한데 모인다. 공장의 ‘사자’라고 불릴 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걸크러시’ 사장님. 종일 서서 배춧속을 채우며, 자기 가족을 든든히 책임지는 포기 여사님들. 툭툭 엉뚱한 질문을 던지지만, 누구보다 책임감을 보여주는 외국인 친구들. 직함은 부사장이나 어느 팀에서나 바닥부터 배우고 있는 저자까지… 이 밖에도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매력을 발산한다. 저자는 이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좀 더 내밀한 세계를 파고드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에 마음이 내내 훈훈하다. 책 한 권에 시트콤의 한 시즌을 정주행 것처럼, 이들이 느낀 희로애락이 오롯이 내 것이 된 것만 같고, 그들과 정이 돈독히 쌓이고 만다.
“김치 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배춧잎 같은 시간이 켜켜로 쌓여 있다”
더 작은 세상으로 와서 만난, 이토록 멋지고 커다란 세계
전직 카피라이터였던 저자는 공장으로 이직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공장이라는, 이토록 멋진 세계를. 나의 다음 스텝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때, 우리는 자연스레 더 큰 곳, 더 근사한 곳, 더 유명한 곳을 떠올리게 되지 않던가. 그 또한 김치 공장을 ‘더 작은 세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곳에서 알게 된다. 결코 작은 세상이란 없음을. 이 책에는 세상에서 관심을 주지 않아도, 주목받지 못해도 김치를 만드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힘껏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업무 효율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공정을 더 쪼개보고, 자신이 담당하는 무 수급이 원활하면 콧노래를 부르고, 자기가 맡아온 일이 너무 소중해서 퇴사를 망설이는가 하면, 가족을 두고 먼 타국에 와서 묵묵히 자기 몫을 해내는 이들도 있다. 노동의 가치가 우스워진 시대에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이들 덕분에, 오늘도 우리의 식탁에는 아쉬움이 없다.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김치 공장으로 이직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엄마가 한평생을 바친 사업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으로 빚쟁이들을 상대하고, 깡패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으며 어렵게 지켜온 공장이었기에 딸이 힘을 보태고자 뛰어들었다.
엄마가 만드는 김치는 세상에 보탬이 된다. 여기에 있으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김치를 만들 수 있다. 쓸데없이 비장하고 장황하지만, 그게 나의 이직 동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말 괜찮은 김치를 만들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오늘도 엄마이자 사장님인 그녀 앞에서 작아지곤 하지만, 앞서 길을 내온 선배들이 남긴 선명한 자국들이 있기에 힘을 내본다. 멋지게 공장을 일궈온 그들의 뒷모습을 따라 걷겠노라 다짐하며, 그저 그런 김치가 아니라 정말 괜찮은 김치를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또 다진다. 혼자가 아니라 이 이야기는 꽤 희망적이다. 그의 파이팅 넘치는 각오가, 고민의 연속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보내는 응원가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