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cognition)가 말해주지 않는 것
이 책의 제목 “탈인지”는 샤비로의 신조어이다. 샤비로는 어떤 것이 부정되거나 무효로 됨을 함의하는 접두사 “탈-”을 “인지”라는 단어 앞에 붙였다. 샤비로에 따르면 인지는 사고에 대한 어떻게(how)와는 관련되지만, 무엇(what)이나 왜(why)와는 관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특정인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과 그를 혼동하지 않는 방식을 설명할 때 ‘인지’라는 낱말은 유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지’는 내가 왜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왜 다른 특정한 사람은 미워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인지과학과 인지심리철학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적자생존’을 욕망한다고 보고 생존을 위해 체득한 도구들에 주목한다. 그러나 유기체들이 추구하는 것이 ‘생존’뿐일까? 화이트헤드를 인용하면서 저자는 살아있는 존재자는 “잘 살기”를, 나아가 “더 잘 살기”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유기체들은 살아가면서 주변 환경에서 정보를 수신하고 수집한다. 그런데 그 존재자는 그 모든 정보로 무엇을 하는가? 그 존재자는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위하는가? 이는 인지의 범위를 벗어나는 질문들이라고 샤비로는 말한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인지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감각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 책은 강조한다. 나무가 잎사귀를 통해 햇빛을 감지하고 식량을 추출하는 것처럼, 감수성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감각하고, 경험하며, 그 영향들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것을 포함한다. 샤비로는 “감수성은 인간에서든, 동물에서든, 다른 유기체에서든, 혹은 인공적인 존재자에서든, 인지의 문제이기보다는 내가 탈인지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에 가깝다.”(16쪽)고 말한다.
SF(과학소설)와 현대사회
과학소설 혹은 SF는 현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화두인 것처럼 보인다. SF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SF 소설들이 폭넓게 읽히고 있고, 국내 작가들의 과학소설들이 해외로 번역되고 있으며, 텔레비전과 OTT 플랫폼에서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기술 가속이 극대화되어 현실이 SF를 넘어”섰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SF 사회”를 살고 있다는 진단(계간지 『문화/과학』, 2022년 가을호)도 제출되었다.
샤비로가 종종 인용하는 벨기에의 철학자 이사벨 스텡거는 자신의 철학자 동료들이 일축했던 이슈들에 관한 논의를 열어냈다는 점에서 과학소설 작가들의 기여가 크다고 말한다.(스티븐 샤비로의 인터뷰). 미국의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SF를 과학소설뿐 아니라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 판타지(science fantasy),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실뜨기(string figure)의 약어로 의미를 확장하면서 SF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SF(과학소설) 사고실험이 할 수 있는 것
스티븐 샤비로는 철학에서의 인간중심주의와 상관주의(세계는 인간에 대하여 또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인 관점)를 극복하려 시도하는 ‘사변적 실재론’ 경향의 사상가이다. 스티븐 샤비로, 그레이엄 하먼, 이언 보고스트 등 많은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들이 저서에서 미국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의 유명한 논문 「박쥐가 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1974)를 인용한다. 네이글의 초점 중 하나는 박쥐가 인간과 공통 세계를 공유하지만, 박쥐와 인간의 경험은 너무나 달라서 인간은 박쥐의 경험이 어떠한지 진정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난점 앞에서 과학소설의 접근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샤비로는 말한다. 과학소설이 종종 차용하는 방법인 외삽(extrapolation)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기술과 사회적 조건을 기반으로 하되, 그 기술과 조건이 현재 가능한 정도보다는 미래에 조금 더 확장 실현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미 우리 현실에 존재하는 인공지능이 감수성을 성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와 같은 질문을 과학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서사로 체화함으로써 탐구한다. 외삽과 연루된 과학소설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거나 경고를 할 수 있다. 또 독자는 과학소설을 읽으며 사고실험에 참여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사유를 가로막는 전제들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의식, 인지, 감각의 문제를 고민할 때도 SF적 사고실험이 유용하다고 샤비로는 본다. 우리가 감각적 존재들임은 분명하지만, 감수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같은 질문에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샤비로가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에서 분석한 소설 「눈먼 자들의 왕국」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감수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을 화두로 삼으며 인지, 의식, 감각을 둘러싼 흥미로운 질문들을 탐험하면서 샤비로는, 우리가 박쥐의 경험이 어떠한 것인지 진정으로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프로그램의 감각적 경험을 직접 알 수 없을지는 몰라도,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신성은 암시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환기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미적 감수성의 환기가 사변적 과학소설의 작용이라고 본다.
책의 구성 : 과학소설적 자아들
이 책은 서론과 일곱 개의 장, 후기, 두 개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샤비로는 감수성, 알아차림, 사고의 문제와 과학소설을 통한 탐구법의 이점을 논의한다.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에서 샤비로는 그 자체로는 과학소설 텍스트가 아니지만 심리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사변과 논증의 초점이 되었던 반사실적 서사 “메리 이야기”에 관해 살펴본다.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에서는 모린 맥휴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왕국」에 관해 논하며, 기계의 감수성 또는 인공지능의 감수성이 자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다.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에서는 인공지능을 둘러싼 문제들을 극적으로 다룬 테드 창의 중편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의 여러 귀결을 따라가며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에 관해 고찰한다.
4장 「인간 존재처럼 생각하기」에서는 R. 스콧 베커의 소설 『뉴로패스』에서 표현된 인간 인지에 관한 제거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견해를 좇으며, 사람들이 실제로 그러한 견해에 따라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본다.
5장 「살인마처럼 생각하기」에서는 마이클 스완윅의 단편소설 「야생 정신」을 따라 최적화된 정신을 살펴보며, 오묘한 방식으로 포스트휴먼에 대해 인간을 옹호하고 다른 형태의 포스트휴먼적 변혁을 상상하도록 촉구한다.
6장 「외계인처럼 생각하기」에서는 피터 와츠의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를 검토하며, 진정으로 이질적인 부류의 지능과, 극단적이고 포스트휴먼적인 정신 변화를 상상하면서 의식의 본성에 관해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7장 「점균처럼 생각하기」에서는 실제로 현존하는 유기체인 황색망사점균이라는 원형질성 점균의 여러 이상한 인지력을 고찰한다. 황색망사점균은 들뢰즈주의적 다양체로 여길 만한 기묘한 개체/개체군으로 살아가는데, 이들이 활동하는 방식은 인간이 확장된 정신이라고 불러온 것을 실현한 것처럼 보인다.
결론의 자리를 대신하는 「후기」에서 샤비로는 자연에 관한 몇몇 사변적 테제를 제시하며, 『탈인지』에 담긴 모든 논증이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는 넓은 철학적 틀을 제공한다.
옮긴이가 작성한 「부록 1」에는 독자들을 위해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몇몇 과학소설에 관한 보충설명이 첨부되었다.
저자의 허락을 얻어 『탈인지』 한국어판에 수록한 「부록 2」에는 인과성과 지각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를 고찰한 샤비로의 논문을 수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