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를 보라”
대한민국호의 성장 엔진이 꺼져 가는 이유
울산, 한반도의 동남쪽 해안가에 위치한 이 공업도시에는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 중산층 노동자 도시’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어 있다. 울산은 지난 60여 년간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에 쇠락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구 115만의 울산은 여전히 외형적으로는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1위의 부자 도시이고, 수출액 기준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에 이어 전국 3위의 광역시이지만, 도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울산은 청년층 신규 고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장년 노동자, 퇴직자 중심의 늙은 도시가 되었다. 지역 대학은 자동차, 조선, 중화학 등 울산 3대 산업을 뒷받침할 인재 공급처 역할을 못 하고 힘을 잃고 있으며, 기술 혁신의 주역인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는 일찌감치 천안 이북의 수도권으로 떠났다. 또 청년과 여성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인구 감소에 직면했다. 4차 산업혁명, 기후 위기, 그린뉴딜이라는 퍼펙트 스톰이 몰려오는데, 전통 제조업을 가진 울산이 어떤 대책과 해법을 찾아야 할지 지자체, 지역 주민, 대기업, 하청과 부품 업체의 이해관계가 저마다 다르다.
기후 위기가 울산 3대 산업에 기회가 됐지만 산업 고도화와 신사업 진출의 전망을 열어 주지 않고 있다. 친환경 전기차와 수소경제는 현대자동차에 기회를 주지만 울산의 자동차 부품 생태계는 이에 대응하기에 취약한 상태이고 개선책도 뚜렷하지 않다. 자동차 부품 업계가 고용하는 5만 개의 일자리는 곧 위기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탈탄소 전환을 요구하는 IMO의 규제는 조선 업계에 선박 수주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고착된 노동 시장 이중 구조로 인한 원하청 간 임금 격차와 불황기의 임금 하락 문제를 풀지 못하면서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친환경 자동차 생태계에 필요한 정밀화학의 전환 역시 정책 역량과 기존 석유화학 산업의 보수성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345쪽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대한민국 산업 수도’ 울산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며 미래를 모색하는 책이다. 울산의 산업 구조와 노동 시장, 사회적 관계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목적은 제조업과 수출을 기둥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에 닥친 위기의 본질을 살피고 종합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울산이라는 대표적 산업도시에 관한 종합 보고서인 동시에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저물어 가는 산업’으로 치부되는 제조업의 현실과 성장 동력을 잃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한 고찰이다.
저자 양승훈은 2019년 조선소에서 5년간 일하며 관찰했던 경험을 토대로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 산업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내놓았다. 이 책으로 산업 현장의 경험을 겸비한 ‘조선소 출신 산업 사회학자’로 주목받았고, 이듬해 한국사회학회 학술상과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5년 만에 출간하는 이번 책은 거제에서 울산으로, 울산에서 대한민국으로 논의를 확장했다. 이는 단순히 공간 지리적인 확장에 그치지 않는다. 제조업 국가 한국이 현재 직면한 곤혹스러운 질문을 에두르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미라클 울산,
모두의 정성과 노력이 모인 ‘좋았던’ 시절
책의 1부는 울산이 그간 어떻게 산업 수도로 급부상했는지, 울산의 60년간 산업 역사를 돌아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1962년 1월 13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같은 달 27일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공포했다. 2월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했다. 6월엔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 두왕리, 범서면 무거리와 다운리, 농소면 송정리와 화봉리를 통합해 울산시 승격을 발표했다. 이후 뒤에서 다룰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진출하여 지금의 울산 3대 산업을 구성했다. 이러한 서사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산업도시 울산의 형성이 박정희와 현대그룹이 이룬 성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근대적 산업도시 울산은 일제 강점기 혹은 그 이전부터 누적된 경로 의존과 다양한 우여곡절 속에서 탄생했다. 산업도시 울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케다 스케타다라는 인물과 제국주의 일본의 대단위 병참기지 건설 계획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 산업도시 울산을 구상하도록 했던 선구자는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라는 사람이다. 이케다는 부산 지역에서 1920~1930년대 개발 사업을 했던 인물이다. 헌병 중사 출신이라는 특별하지 않은 이력에도 동양척식회사와 정군관政軍官계와의 인연으로 빠르게 사업의 규모를 확장했다. (…) 1942년 12월, 울산개발계획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최종적으로 허가받았다. 1943년 5월 11일, 지금의 학성공원에서 기공식이 거행됐다. 이처럼 울산은 이케다에 의해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 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서 설계됐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 이케다 스케타다의 산업도시 계획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70퍼센트 완공 단계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일제가 구상했던 석유 비축기지이자 정유 공장의 흔적은 결국 산업도시 울산의 경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 48쪽
1962년 대한석유공사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울산 정유 공장의 복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어 1970년대에는 현대중공업의 조선소 설립이 이루어지는데, 정주영 회장이 1970년 12월 그리스 리바노스사로부터 유조선 2척 선박 수주를 먼저 따내고, 부지 조성(1971년 4월), 조선소 기공식(1972년 3월)이 그 뒤에 진행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현대자동차의 울산공장 준공은 이보다 뒤인 1975년의 일이다. 수출주도 산업인 울산의 3대 산업은 1990년대에 들어 큰 호황을 맞는다. 조선 산업은 10년 초호황기 슈퍼사이클에 들어섰고 현대자동차는 2000년대에 오면서 ‘생산량 기준 글로벌 Top 5’로 올라섰다. 이후 2017년 서울에 1위를 빼앗기기 전까지 울산은 근 20년 동안 한국에서 일인당 GRDP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울산의 호시절이었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울산의 역사를 미라클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과 필연, 기획자와 실행자 모두의 노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석유 비축을 위한 기지로 출발해, 그 밑천으로 정유 공장을 짓기 위해 군사정부와 기업가들의 고려로 공업센터로 지정됐다. 눈이 밝은 정부의 기술관료가 중화학 요충지로 울산을 꼽았다. 그렇지만 그걸 실제로 실행했던 1970년대의 모험 자본가 정주영의 현대가 있었고, 잠을 설치면서 눈썰미를 가지고 도면과 기술을 베껴 오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안전 요건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배를 짓고 자동차를 만들어 냈던 울산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만화 《드래곤볼》의 원기옥처럼 모두의 정성이 모여 노동자 도시이자 부자 동네 울산의 기적을 써낸 것이다. - 68쪽
지식 기반 경제 시대의 도래,
제조업 강국의 깃발은 내려도 좋은 것일까
울산의 위기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호황의 한복판을 거치며 내부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국제 수급 사이클이 바뀔 때마다 수익이 출렁였고, 자동차는 1998년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 충돌을 비롯해 크고 작은 분규에 휩싸였으며, 호황기가 끝난 조선 산업은 2010년대에 들어서 구조조정에 직면했다. 이를 전후로 제조업 전반에 대한 위기감이 우리 사회에 퍼져 나갔다.
이 책의 2부는 울산과 한국 경제가 처한 제조업 위기론의 심층 분석이다. ‘제조업 시대가 저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