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 진다』는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관록의 작가 미야모토 테루의 장편소설로, 주인공 료헤이의 대학 사 년간의 궤적을 좇으며 청춘의 눈부신 열정과 나른한 우울을 담백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1982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30쇄를 웃도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2007년에 재출간되었을 정도로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그야말로 청춘소설의 고전이자 스테디셀러입니다.
재수생 시이나 료헤이는 목표했던 교토의 대학에 들어갈 성적이 되지 않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새로 생긴 대학에 지원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지원서를 내러 간 날, 빨간 레인코트를 입은 미모의 여학생 사노 나쓰코와 마주쳐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입학 첫날에는 테니스부원을 모집하던 거구의 가네코 신이치와 만나는데, 그의 페이스에 말려 얼떨결에 테니스부에도 발목을 잡히고 맙니다. 우연히 마주친 이 두 사람이 료헤이의 대학생활을 좌우합니다.
이 소설에는 나쓰코라는 버거운 상대와 테니스에 매달린 료헤이의 대학생활을 통해 풋사랑과 우정, 좌절과 우울, 미래에 대한 불안이 교차하는 청춘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젊음이라는 보석과 넘치는 자유를 가지고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고 망설이는 청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놓치고 마는 청춘, 뭔가에 혼신의 열정을 쏟고 환희를 맛보거나 좌절을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청춘……. 청춘을 기다리는 사람이든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이든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입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 파랑은 청춘을 상징합니다. 청춘이란 말 그대로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날 같아서 영원하지 않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 소설은 졸업을 앞둔 료헤이가 인생에서 한 시절이 끝났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출발에 대한 암시로 가득합니다. 소설가 모리 에토는 이 작품에 대한 서평에서 “책을 덮고 끝도 없이 상상했다. 그와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걸까?”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미야모토 테루가
섬세하게 묘파해낸 우리 청춘의 풍경
대학시절, 미성년에서 어른으로의 경계에서 보낸 사 년
『파랑이 진다』의 주인공인 료헤이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집안, 마른 체구에 평범한 외모, 뛰어나게 잘난 점도 없다. 그는 공부라는 의무에서 해방되고 사회의 속박에서도 자유로운 캠퍼스에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할지, 무엇을 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우연히 테니스부에 가입한 후에는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면서도 프로가 될 것도 아니고 일류 선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하고 계속 고민한다. 겉으로는 안온해 보이는 사 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료헤이의 내면에서는 열정과 집념, 불안과 방황이 소용돌이친다. 더욱이 그는 무디게 넘길 수 있는 사소한 사건이나 감정도 젊은이다운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여과해 받아들인다. 하지만 뭔가에 매달리고 시행착오를 겪고 한계를 절감하고 그러면서 성장해가는 그에게 방황과 고민은 무의미한 낭비가 아니라,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일학년밖에 없던 신설 대학에 하나둘 부속 건물이 들어서고 모든 학년이 갖춰지는 동안, 료헤이와 친구들은 미성년의 치기 어린 모습을 벗고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난 유코, 야구부를 그만두고 가수의 꿈을 이뤄가는 걸리버, 학업을 중단하고 사업에 뛰어든 하야마, 마지막으로 언제까지고 테니스만 계속할 것 같던 테니스부원들까지 모두 자신의 할 일을 찾아 캠퍼스를 떠난다. 그러나 료헤이는 주위 사람들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다들 뭔가를 잃었는데 자신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자신만 빼고 모두가 변해가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은 청춘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정서다. 이 작품이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고 있는 것은 이처럼 자유로우면서도 불안해하고 열정적이면서도 망설이는 청춘의 보편적인 감성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
“인생에서 가장 가슴 설레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연애야 연애. 당연히 연애지.”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의 말대로, 인생에서 가장 설레는 일. 더욱이 스무 살의 청년들에게는 더욱 설레는 일인 연애. 그러나 사 년간 한결같이 바라보기만 하는 료헤이의 사랑은 결국 보답받지 못한 채 끝난다. 료헤이뿐 아니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은 대개 이루어지지 못한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비밀에 부쳐진 상태에 오해와 추측이 더해지면서 엉킨 관계는 더욱 꼬여가고, 고백은 절묘하게 타이밍을 빗겨간다. 한쪽이 다가가면 다른 쪽에서는 물러나버려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늘 좁혀지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랑에 빠진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기도 하고, 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정작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영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가슴속에 묻어두는 사랑도 있다.
실연을 당하고 나서도 싸구려 만두에 맥주나 마시며, 화장실에 숨어서 울고, 기타를 치며 노래나 부르는 것이 전부인 풋사랑이지만, 이렇듯 엇갈리는 그들의 사랑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한편 청춘이기에 가능한 풋풋함과 싱그러움, 또 그에 비례하는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승부란 없다. 인생도, 테니스도
“버틸 작정이라면 끝까지 버티는 거야. 테니스는 도중에 어떻게 흐름이 바뀔지 아무도 몰라. 어느 순간 갑자기 공이 안 들어가지. 어떤 선수라도 그럴 때가 반드시 오거든. 한 시합에서 한두 번은 그런 상태가 돼. 그걸 기다리는 거야. 기다리는 동안에 점점 강해져.”
스포츠와 청춘은 종종 세트처럼 다뤄진다.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는 맹훈련, 열기가 넘치는 시합, 승리의 환희, 패배와 좌절 등 모두 청춘과 어울리는 표현이다. 『파랑이 진다』는 대학 4년을 테니스에 바친 젊은이들을 그리면서, 동시에 테니스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우정을 다루고 있다.
테니스에 임하는 각 인물의 태도는 인물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료헤이는 정석대로 그럴듯한 테니스를 추구하지만 정작 자신만의 특기가 없어 고민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주목받던 테니스 천재 안자이는 유전적인 신경불안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시니컬한 구다니는 강한 것보다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변칙 플레이어, 가네코는 전국대회 출전이라는 목표를 놓고 연습에만 매달리는 외골수다.
테니스시합에 대한 묘사도 일품이다. 천재 안자이와 패도의 구다니의 대결, 슬럼프에 빠진 료헤이와 자신만만한 후배 퐁크의 대결, 가네코와 료헤이 복식조와 실력 차이가 엄청난 스타플레이어들의 경기에서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뿐 아니라 게임의 흐름을 읽고 상대방의 허점을 노리는 심리전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빛을 발한다. 테니스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관심이 없더라도 그 분위기를 충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