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성차별은 일상의 문제다
201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metoo 해시태그와 아래로부터 분출된 여성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목격자이고 증언자였다. 수많은 고발들이 있었다. 지금도 매일, 매월, 매년, 폭로가 계속되고 있다. 가해자들은 고발당하고, 일부는 신상이 공개되고, 일부는 수감되고, 일부는 벌금형을 받았다. 왜 성폭력 고발은 끊이지 않는가?
성폭력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폭력은 특별한 사람에 의해 벌어지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의 문제다. 저자 이라영은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여러 사람들의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성폭력 폭로에 대한 글을 쓰기가 어려”웠고, “다른 사람이 겪은 일에 분노하다 보면 자꾸 ‘내 얘기’가 끼어든다.”(15쪽)고 썼다. 그래서 이 책의 1부 “복기”는 증언자와 고발자 들에 대한 “말의 연대”로서,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경험한 폭력과 차별의 역사다. 폭력과 차별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버스에서, 지하철 안에서, 대학에서, 엠티에서, 동아리에서, 지인의 집에서, 식당에서, 사무실에서, 출장지에서, 일어난다.
문화화된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일상적 폭력이 반복해서 발생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피해자의 말보다는 가해자의 서사가 존중받는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에 따르면 평범한 얼굴로 나타나는 ‘문화화된 폭력’은 훨씬 더 저항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화된 폭력은 제도적으로 잘 해결되지 않는다. 조직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조직과 대의를 생각하여’ 침묵할 것을 강요당한다. 법은 자주 권력과 자본, 가해자의 처지에 동조한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려 애쓰지만, 피해자에게는 단순한 ‘피해자다움’의 기준을 들이대 진실을 의심하곤 한다. 법 앞에서 피해자는 수도 없이 ‘진정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수치심은 늘 피해자의 몫이다. 오히려 피해자가 폭력을 유발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살고 싶어 시작한 고발과 소송 이후에도 백래쉬와 마녀사냥이 피해자를 기다리고 있다.
폭력에 맞서는 개개인의 발화가 중요하다
뜻밖에도, 19세기 미국에서 초상 사진을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은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였다. 1818년에 노예로 태어나, 1838년 탈출에 성공하여 스스로를 해방한 흑인으로서, 더글라스의 ‘흑인의 얼굴 드러내기’는 일종의 “요구, 곧 발화였다.”(125쪽) 저자 이라영은 이 책의 서문에서, 2016년 8월 관람한 ‘프레더릭 더글러스 초상 사진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다. 저자는 더글라스가 1895년 사망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사진을 남겼다는 사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어린 시절 노예였던 더글라스는 백인 동년배들과 달리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 부모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지배 권력은 피지배자 자신이 스스로 누구인지 모르게 만든다.
저자 이라영은 더글라스의 초상 남기기가 바로 이 지배 권력에 저항하면서 “시각적 재현의 권력에 균열을”(126쪽) 내는 행위였음을 읽어낸다. 노예제와 인종주의 문화의 피해자였던 더글라스는 당당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을 남김으로써 소수자로서의 수치심을 떨쳐버렸다. 이 책은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일생에 걸친 노력처럼, 폭력에 맞서는 개개인의 발화가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에게 덧씌운 수치심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소수자들의 발화가 공론장에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
복잡한 사적 서사를 이해받을 수 있는 개인이 있는 반면, 흑인, 여성, 장애인 등 보통명사로 뭉개지는 사회의 수많은 소수자와 약자들이 있다. 약자는 개인이 되지 못한 존재들이다. 어떻게 ‘최소한의 개인’이 될 수 있을까? 개인이 되지 못한 존재는 보편적인 ‘사람’도 되지 못한다. 수시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 책의 2부 1장의 제목이 「보이지 않는 인간」인 이유다.
사회적 약자들은 먹고살기 위한 노동 이외에 보이지 않는 노동을 더 해야 한다. 모멸을 견디는 것, ‘약자다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상대의 감정을 살피는 것 등이다. 예컨대 “장애인이나 흑인은 착해야 하고 여성은 친절해야 한다.” 여성이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순간 ‘쓸모없는 여자’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노동을 멈추는 순간 약자들은 ‘~답지 않다’는 공격을 받게 된다. 소수자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는 ‘보이지 않기 위한 노동’도 있다. 청소노동자들이 청소도구실에 들어가 휴식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모습이 그들이 청소하는 시설의 이용자들에게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약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107~108쪽)
보여지는 인간 : 기술복제시대의 폭력
소수자들은 어떻게 ‘보여지게’ 되는가? ‘보기’와 ‘보여주기’가 넘쳐나고, 자기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관계를 맺고 생산활동을 하는 것이 강제되고 또 당연시되는 시대에, 소수자들은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n번방, 위디스크, 불법동영상을 통해 ‘보여진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기술복제시대의 폭력’이다. 전 세계 수십억 사용자를 거느리고 있는 페이스북의 이름이 창업자 주커버그가 만든 여학생 얼굴 품평 시스템인 ‘페이스매시’(Facemash)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162쪽)
오늘날 심각한 사회문제인 디지털 성폭력은 소수자를 억압하는 사회에서 보여주기가 어떻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술복제시대에 ‘비대면 폭력’은 양적으로 증가하고 대중화된다. ‘몇 번’이라는 정확한 숫자로 기록되지 않은 폭력 속에서 여성들은 죽어간다.”(144쪽) 저자의 말처럼 기술복제시대에는 ‘보는 폭력’이 치명적이다. 하지만 법원행정처 차장은 딥페이크가 ‘예술작품’일 수 있다고 말하고, 국회의원은 디지털 성착취물을 그림일기에 비유하거나 성착취물 시청을 ‘남성의 자기만족’이라고 정의 내린다. 법무부 차관은 남성 청소년들의 ‘관행’으로 치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보는 폭력’은 긴급한 사회적 의제로 논의되어야만 한다. “ ‘동영상’ 찾는 행위가 바로 성폭력”(146쪽)이다.
듣는 인간에서 말하는 인간으로
이 책에 따르면 보통명사로 불리는 이들은 얼굴, 이름, 목소리가 있는 ‘개인들’이 되어야 한다. 소수자들의 투쟁은 그렇게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한 싸움이었다. 소수자와 약자, 피해자들은 자주 침묵을 강요당한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 소수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직접 설명하지 못하는 고통은 타자화되어 해석당한다.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마녀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표현할 수단을 잃어버린 사람은 표현의 자유와도 무관해진다. 이들은 표현 밖의 존재다.”(189~199쪽)
저자는 말하기의 중요성을 부단히 강조한다. 저항의 언어는 늘 진압당한다. 하지만 저자는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목소리’ ”라고 쓰면서, “최선의 연대”는 2016년 강남역에 붙은 포스트잇이 그러했듯이 “ ‘아직 살아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쓴다.
“침묵시키는 권력에 저항하기. 이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기 위한 분투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고, 이름 없는 자의 이름을 부르자. ‘우리’는 서로에게 침묵하는 목격자가 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306쪽)
저자 인터뷰
Q. 성폭력 고발들의 연쇄를 보면서 글을 쓰려고 하면 “자꾸 ‘내 얘기’가 끼어든다”고 쓴 대목에서 많은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