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굴과 아이』는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최연소(당시 25세) 작가로 초대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화가 중 한 명인 문성식의 드로잉 작품들과 에세이를 함께 엮은 책이다. 화가가 2009년부터 써온 일기와 계간 『현대문학』에 발표한 칼럼들, 그리고 2002년부터 최근까지(2014년) 그린 드로잉 가운데 엄선한 대표작 66점을 수록했다.
‘페이퍼패션Paper Passion’ 시리즈 두 번째 책으로 제작된 『굴과 아이』는 회화 작품의 디테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원화의 느낌을 잘 전달하기 위해 본문 전체가 올컬러로 인쇄되었으며, 스웨덴산 고급 인쇄지를 사용하고 실로 꿰매는 사철제본 방식을 채택하여,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즐기고 경험할 수 있는 보기 드문 회화 작품집이 되었다.
▶ 원화의 느낌을 온전히 담아낸 최상의 드로잉북
책이라는 매체에 회화 작품을 제대로 담기란 쉽지 않다. 다양한 크기의 작품을 제한된 화면 안에 일률적으로 축소하여 담아내기에, 스케일의 차이에서 오는 미감을 경험하기 어렵다. 또한 인쇄된 책으로는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의 질감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이유로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관련 종사자가 아니고는 회화 작품집을 필요로 하거나 그저 취미로라도 감상하는 경우가 드물다.
화가 문성식은 데뷔 초 ‘편집증적 치밀함’이 느껴지는 강렬한 채색화로 단숨에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나무 한 그루 안에 담긴 잎사귀들을 모두 그려낸 듯 정교하고 촘촘한 붓질로 이룩된 그림은 수십만 개의 픽셀들이 모여 완성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처럼 인위적이고 낯선 형상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가장 구체적인 나무 그리기를 통해 가장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나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이후 작가는 더욱 넓은 화면에 숲, 땅, 나무, 그리고 그 속의 생물들을 담아낸 <정원> 시리즈, <황무지> 시리즈 등을 발표하며 자신의 테마를 회화적으로 풍요롭고 정밀하게 표현해내는 데 힘써왔다.
한편, 문성식 작품 세계의 또다른 중요한 축을 이루는 드로잉은 채색화에서 추구하는 회화적 목표나 완성도와는 별도로, 보다 작가에게 가깝고 솔직한 그림 그리기의 실제를 드러낸다. 작가는 데뷔 전인 2002년부터 꾸준히 드로잉 작업을 해왔으며, 개인전은 물론 여러 차례의 그룹전에서도 언제나 드로잉 작품을 발표하여 사랑받았다. 특히 2013년 두산 뉴욕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이루어진 제3회 개인전은 제목 자체가 이었을 만큼, 드로잉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각별하다.
무엇보다 그의 드로잉 작품들은 소재와 사이즈의 측면에서 책에 담아내더라도 원화의 느낌이 큰 손상 없이 잘 전달된다. 캔버스에 그린 몇몇 큰 그림이나 먹으로 그린 드로잉들을 제외하면, 소박한 질감의 작은 연필그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날의 작업 내용과 일상을 꾸준히 기록해왔으며, 계간 『현대문학』에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가의 활동과 작업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책, 『굴과 아이』다.
▶ 책의 구성 및 내용
『굴과 아이』는 작품의 테마와 기법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총 9개의 챕터로 구성되었다. 문성식의 작품을 이루는 테마는 크게 자연의 풍경, 동물(생명)의 풍경, 인간의 풍경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테마들엔 각각 세계와 생명,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가 다양한 결로 깃들어 있다.
아이의 눈으로 본 자연―두렵고 매혹적인 미지未知
화가는 김천에서 포도 농장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사계절 내내 산과 숲과 개울에서 뛰놀았고, 화목하고 정이 넘치는 대가족 속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의 부모는 힘들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마늘밭 한쪽에 튤립을 심고 가축이 아닌 온갖 새들을 키우고 삼남매 모두 예술을 공부시켰다. 이런 남다른 환경 덕분에 작가는 일찍부터 꾸밈없고 솔직한 아이의 눈으로 자연을 탐구할 수 있었고, 인간과 동식물과 자연의 경계가 없는 삶을 체험했으며, 생명에 대한 강렬하고 따듯한 시선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시간’과 ‘생명’에 대한 아득한 시선,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을 ‘그림’이라는 수단으로 표현해내려는 화가의 노력이 잘 드러난 작품들이 에 실려 있다. 다채로운 선과 겹을 품은 검은 드로잉들로 구성된 챕터로, 흑과 백의 대비, 어두운 것과 더 어두운 것들의 변주가 인상적이다(「굴과 아이」, 「별과 소쩍새 그리고 내 할머니」, 「형과 나」, 「숲과 형제」 등).
또한 자연 속에서 하나의 풍경이 되어버리는 미약한 인간의 삶은 에서 ‘숲’이라는 구체적인 배경을 통해 한층 더 쓸쓸하고 부드럽게 표현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사냥을 다녔던 날들, 크리스마스트리에 쓸 ‘삼각형’ 나무를 찾아 숲을 헤매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글과 그림들이다(「사냥」,「겨울」, 「밤을 위한 드로잉」, 「미친 과부」등). 사냥과 눈 오는 날을 마냥 즐거워하던 아이가 자라나, 생명 가진 것들이 견뎌야 하는 고달픔과 근심을 헤아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한 인간의 절실하고 순수한 성장의 기록과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엔 개인이나 시공간을 뛰어넘는 울림이 있다.
작가에게 자연은 거기 있으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무한한 풍경이다. 자연은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주는 미지의 세계이며, 이 모든 생명을 가능케 하는 유일무이한 배경이다. 인간과 동물과 식물 들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만을 살다 가는 ‘찰나’의 존재다. 그리고 이 ‘필멸’의 존재에게 부여된 유일한 임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성실히 살아내려 애쓰는 것뿐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연민과 응시의 풍경
풍요롭고 순박한 ‘자연의 아이’로 자란 작가에겐 ‘육체’를 가지고 ‘자연’을 이기며 살아가는 시골 사람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다. “나는 ‘그림 그리기’가 재미있고 재주가 있어 그걸 계속하며 살게 되었지만, 이들은 어쩌다 이렇게 온몸으로 자연을 감당하며 평생을 살게 되어졌나?”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며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자연을 복원해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리고 다정한 마음가짐으로 화면에 담는다. 과 , 에는 이처럼 ‘서정적’ 또는 ‘한국적’이라 부를 수 있는 작가의 유년 체험과 여기에서 무르익은 회화적 재현이 순수하고 소박한 글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다른 한편, 과 에는 추억으로 얽히지 않은 ‘타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예술적 목표와 의지를 가진 화가의 눈으로 관찰한 대상이다. 「과부의 집」이나 「봄날은 간다 간다 간다」, 「청춘을 돌려다오」, 「가족」 등에 등장하는 인간이 작가의 내부에 남아 있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기억의 잔상이라면, 「싸움」,「청춘」,「맹인 3총사」,「진지하게」에 나오는 사람들은 외계이자 현재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싸우고, 욕망하고, 울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을 때, 화가는 대상에 대한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무심하고 군더더기 없는 실제를 마주할 때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보듬어 안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자 우리 자신인 존재―동물의 풍경
문성식 그림에는 늘 개와 고양이 그리고 온갖 새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때로 자연의 일부로, 때로 (인간의) 일상의 일부로 나타나지만, 언제나 결국은 우리 자신의 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