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마지막 책, 문화와 폭발
모스크바-타르투 학파의 수장이자 문화기호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유리 로트만의 『문화와 폭발(Kultura i vzryv)』(1992)을 우리말로 옮겼다. 사회사상사 연구로 시작하여 1960년대 구조주의와 기호학, 1970년대 문화이론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독창적 사상을 일구어낸 로트만은 생애 마지막 저작에서 ‘폭발’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며 새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폭발, 문화적 역동성을 위한 본질적 메커니즘
폭발은 점진적 과정 중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단절을 가리킨다. 역사의 흐름이 ‘예측불가능성’에 맡겨지는 급격한 단절의 상황이 바로 폭발의 국면이다. 미래의 모든 발전 가능성이 잠재해 있지만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선택이 결코 인과관계나 핍진성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곳, 아니 그런 메커니즘 자체가 완전히 작동을 멈추게 되는 장소가 바로 폭발이다.
로트만은 폭발을 “기호학적 지층에 뚫린 창문”이라고 규정한다. 그 창문은 몹시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창조적이다. 이처럼 폭발의 개념은 문화의 역동성을 위한 본질적 메커니즘이자, 기호학적 생성과 자유를 위한 불가피한 계기로서 재규정된다.
폭발의 흔적과 자리
『문화와 폭발』 전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번역 불가능한 것, 소통 불가능한 것,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 지니는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일관된 강조이다. 폭발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 아닌 차이,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 규범이 아닌 예외이다. 로트만은 러시아 문화사의 구석구석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다채로운 폭발의 흔적들을 탐색한다. 러시아 역사의 유명한 ‘광기’와 ‘폭정’의 사건들(이반 뇌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각종 ‘뒤집힌’ 형상들(여장남자, 남장여자), 러시아 인형 마트료슈카 같은 이질동상의 구조들(‘텍스트 속의 텍스트’), 그리고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빼어난 ‘거짓말’과 ‘꿈’의 장소들이다. 이와 같은 온갖 ‘기행’의 형식과 구조야말로 역사의 폭발적 변화가 움트는 바로 그 장소이다.
폭발의 시대에 작성된 폭발의 담론
『문화와 폭발』은 ‘폭발의 시대’에 작성된 폭발에 관한 담론이다. 1992년 그해 로트만은 소비에트라 불렸던 20세기의 가장 중대한 유토피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폐허’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역사와 세계 문화의 폭발적 국면에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와병중임에도 그와 같은 사회적 격변에 ‘서둘러’ 응답하고자 했다(로트만은 이 책을 출간하고 1년 후 사망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몰락의 풍경이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낳게 될 진정한 폭발이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폭발과 러시아 문화의 이원적 모델
역사의 예측 불가능한 도약과 변화를 겨냥하는 폭발의 개념은, 언젠가 로트만 자신이 정식화한 바 있는 러시아 문화의 ‘이원적 모델’과 뗄 수 없이 관련된다. 서구의 삼원적 모델(천국-지옥-연옥)과 구별되는 러시아의 이원적 모델이란 가치론적 중립지대(연옥)를 알지 못하는 양극적 구조를 가리킨다. 모든 새로운 것은 오로지 과격하고 철저한 단절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 구세계의 종말론적 파괴 위에서만 구축될 수 있다는 사고는, 러시아 문화의 심장부를 관통한다.
연속성과 계승 대신 단절과 파국을, 타협과 절충 대신 원칙주의와 극단성을 추구하는 러시아 문화야말로 폭발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러시아 문화의 근간에 뿌리박힌 이원적 정신구조, 그 폭발의 사유가 야기할 수 있는 현실적 위험과 파국적 결과에 관해 로트만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 위험하고 두려운 폭발의 대체 불가능한 잠재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폭발이 수반하는 ‘심오한 위기,’ 그것은 (연속성의 삼원모델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근본적인 혁신’의 다른 이름이다.
탈구된 시간성과 파국의 양가성
폭발을 둘러싼 로트만의 사유는 우리 시대의 가장 첨예한 쟁점 중 하나인 ‘파국의 상상력’에 말을 건넨다. 폭발의 시간 개념을 나타내는 ‘탈구’, 즉 ‘시간에서 빠져나온’ 시간성이다. ‘폭발’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로트만이 남겨놓은 이 난제는, 시간성과 결부된 현대적 성찰(“메시아적 시간성” ― 데리다)들과 더불어 우리 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흥미로운 좌표에 다름 아니다. 그 난제와 더불어 씨름하는 것, 나아가 이를 동시대의 다른 사유들과 생산적으로 ‘접속’시키는 일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옮긴이 김수환은 로트만 전공자로서 이미 역서(『기호계』)와 저서(『사유하는 구조』)를 출간해 2000년대 들어 늘어가는 로트만을 향한 국내의 관심을 선두에서 이끈 연구자이다. 그는 이번 『문화와 폭발』의 번역에서도 거장의 움트는 새로운 사유와 그 함의를 정확한 해석과 충실한 해제로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