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복잡한 근현대사는 남과 북의 관점, 즉 일국사적 관점이 아니라 세계사적, 동북아 관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진정한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오늘날 남북 대결의 철학적 뿌리는 ‘항일’이다. 항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여기서 수세로 몰리면 한쪽은 항일세력이 만든 국가라는 정통성과 민족적 권위를 선점하게 되고, 반대쪽은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세운 국가라는 낙인과 오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항일을 하되 외교적이고 문화적이고 교육적으로 했느냐, 아니면 화끈하고 선명하게 무장 투쟁의 방식으로 했느냐. 이것은 후자가 절대적 도덕적 권위를 쟁취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독립운동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화가 됐고,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이 부분을 잘못 건드리거나 그 정신을 훼손하면 가차 없이 ‘친일’의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따라서 이 주제는 거의 종교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김일성을 수식하는 용어를 분해해 보면 ‘만주’ ‘항일’ ‘무장 독립운동’ 등 세 덩어리로 의미가 분절된다. 필자는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 세 덩어리의 실체를 추적한다. 쓸 데 없는 선입관이나 가치관을 버리고 그 의미를 추적하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만주라는 공간에서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의 남과 북의 운명을 가른 지도자 그룹이 형성됐고,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혹은 자유민주주의자)들 간에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분단의 유전인자들이 이미 1920~3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데올로기의 진영 대립에 외세가 개입되어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의 복잡한 근현대사는 남과 북의 관점, 즉 일국사적 관점이 아니라 세계사적, 동북아 관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진정한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일성이란 존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벽은 김일성은 대체 몇 명인가 하는 점이다. 김일성이란 이름의 한자 표기가 네 가지나 혼재(金日成·金一成·金一星·金日星)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명인 김성주도 한자 표기가 세 가지(金聖柱, 金成柱, 金誠柱)나 된다.
여러 학자들의 노력 끝에 구한말 대한제국의 멸망기에서부터 일제하 만주 일대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항일 독립운동가나 공산빨치산 활동가를 찾아낸 것을 취합하면 총 11명이다. 이 중에서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일성으로 추론할 만한 인물군은 세 명 정도로 압축된다.
워낙 학자들의 견해가 상반되어 김일성이 한 명이었는지, 아니면 세 명(제1의 김일성, 제2의 김일성, 김성주)인지도 명쾌하게 결론을 낼 수 있는 사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아 헷갈리게 만든다. 어쨌거나 김일성이 한 명이었는지, 세 명인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늘날 북한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모든 인물들의 행적을 북한 지도자 김일성 한 사람의 업적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김일성 신화는 그 출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허위, 거짓, 조작, 날조, 남의 것 가로채기, 과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 무시무시한 거짓의 숲에서 자료와 증언을 통해 진실을 추적하는 작업
따라서 이 책에서는 북한이 ‘경애하는 수령님’으로 떠받드는 김일성의 행적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구성을 했다. 그 총합으로서의 김일성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간 이래 평양 창덕학교 2년, 독립군이 세운 화성의숙 6개월을 제외하고는 모든 교육을 중국 학교에서 받았다.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 중국 국적도 취득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중화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중국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중국어는 만주 일대에서 마적질과 공산당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유용한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민족주의적 성향의 활동을 했던 부친 김형직이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죽고, 모친 강반석이 어린 세 아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만주의 공안대장에게 재가를 하면서 사춘기 소년 김일성의 인생이 크게 빗나가기 시작한다. 중국인 양부(養父)의 지원으로 길림 육문중학에 입학했으나 공산주의 서클 활동에 휘말려 중퇴한 이후, 그는 이종락 일파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 명목으로 강제 세금 징수, 테러와 살인을 일삼았고, 독립운동가 양세봉 장군이 보낸 고동뢰 소대를 몰살하고 도주했다. 이 와중에 살 길은 공산 항일부대에 가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 인생 전환을 하게 된다.
1933년 9월 동령현성 전투에 공산유격대의 일원으로 참가하면서 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이 청년은 때로는 김성주로, 때로는 김일성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며 중국인 직속상관들의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면 당시 공산유격대 활동에 종사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나마 중학 교육을 받아 중국어와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김일성의 존재는 매우 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가 중국공산당 유격대 내의 한인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민생단의 광풍에서 살아남은 것은 동료나 상관들을 처절하게 밀고하거나, 중공당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주구(走狗)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북한이 요란하게 떠드는 김일성은 그 존재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그것은 중요한 팩트(fact)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그가 어떤 항일투쟁을 했고, 한민족 역사발전 과정에서 순기능을 했는가, 그 반대인가의 여부다.
김성주는 어린 시절부터 만주라는 거친 환경과 질풍노도의 소용돌이 역사에 맨몸으로 노출되어 국가관이나 역사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중화사상에 지배되었고, 만주 일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마적질과 인명 살상을 일삼았다. 중국공산당 유격대의 빨치산으로 입산한 그는 만주 지역 일대를 살인자로서 도망 다니던 시기에 체득한 거친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중국공산당 간부들에게 충성을 바쳤고, 자신의 국적인 중국에 충성했으며, 중화 조국(祖國) 옹호와 실지 동북(失地東北)의 회복을 위해 불철주야 활동했다.
중국 국적자로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화 조국의 옹호와 실지 동북의 회복 투쟁에 앞장서다가 중국을 탈출하여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군 소속이 된 그는 재빨리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다. 자신이 섬겨야 할 상국(上國)과 충성을 바쳐야 할 상대를 중국과 중국공산당에서 소련과 소련공산당으로 재빨리 바꾼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북한 지역에 공산 위성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내세울 지도자가 필요했다. 평양 주둔 소련군 제25군 사령부는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은 서울에 있었고, 38선 이북 지역에는 믿을 만한 공산당원을 찾기 힘들었다.
지도자 후보로 여러 인물을 물색하던 중 하바로프스크에서 자신들이 군사첩보 공작원으로 양성한 김일성, 즉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金聖柱)를 발견하게 된다. 소련군정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성주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활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소련군정은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 지방에서 항일 빨치산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련군정 사령부에서 일했던 박길용의 회고의 의하면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와중에 김성주(金聖柱)라는 자는 보천보를 습격하여 유명해진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金成柱)와 발음이 같고, 러시아어나 로마자로 쓰면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베리아의 소련 첩보부대는 연령차를 무시하고 김성주(金聖柱)를 김성주(金成柱)로 바꿔치기하여 그를 ‘김일성 장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