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나무로 자라는 동안의 기록
유희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이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지난 2013년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구슬모아 당구장’에서 전시의 일환으로 펴냈던 시집을 다듬어 2017년 아침달의 시인선으로 복간한 뒤 다시 1년 6개월 만에 한 편의 시가 더해져 ‘아침달 시집’으로 재출간했다.
유희경의 시들은 여전히 투명하고 여리다. 시리고 아프다. 좀더 넓어지고 한편 단단해졌다. “불행한 서정의 귀환”(문학평론가 조연정)이라 명명되었던 첫 번째 시집이 작은 감정들에 대한 기록이었다면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수직과 수평의 시간 위에 놓인 감정을 가만히 지켜본다. 이 응시는 외면도 개입도 아니다. 거리로부터 생겨나는 뜻과 음을 담담하게 살피려는 태도이다. 한 발짝 물러서서 물방울처럼 투명한 언어로 일생의 결을 만져가는 시인 유희경의 서정이 한 그루 나무처럼 울창하게 자라난다.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의 시작은 「다시, 당신의 자리」이다.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에 실렸던 동명의 시 「당신의 자리」의 변주(變奏)라 할 수 있는 이 시는 시인 유희경의 시적 태도가 변화했음을 잘 보여준다. 첫 시집의 「당신의 자리」가 나와 당신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경계에서 맴돌며 절망하고 있다면, 이번 시집에 실린 「다시, 당신의 자리」는 “나”(자아)와 “당신”(타자)의 경계가 곧 나의 자리와 당신의 자리를 만드는 것임을, 그 안에서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의미가 생길 수 있음을 비로소 인정한다. 이 인정은 ‘거리(距離)’이다. 이것이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다.
얼어붙은 새벽은 어둡고 조용했네
기억은 왜 자꾸 언덕을 낳는지
미끄러지듯 가팔라져가는
마른 눈 맞으며 그때, 나는
무엇을 찾으러 가는 중이었을까
─43쪽, 「겨울의 언덕」 부분
이 시집의 각각의 시편에는 ‘나무 하나’, ‘나무 둘’과 같은 순번이 매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서른아홉 그루의 나무가 심겨 있는 하나의 숲과 진배없다. 시인은 시 서른아홉 편에 자신이 살아온 서른아홉 해의 의미를 담는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숲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각기 다른 나무들이 각자의 자리에 놓인 것처럼 시인은 자신의 생 곳곳에 시를 세워 시적 이정을 삼는다. 종(種)도, 크기도, 의미와 목적도 다른 시적 장면들로 한 권의 시집을 자신이라는 ‘숲’으로 만드는 것이다. 숲에는 거리가 있다. 나무와 나무의 거리가 숲을 만들고, 나무와 나의 거리가 숲을 만든다.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떠올리고, 그러나 그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오히려 되묻는다. 그순간 수평을 향하여 번져나가던 시간이 수직으로 멈춰서 시로 태어난다.
한 남자가 있고 한 그루
나무와 당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만큼
어떤 시간이 지나가고 나도
모르고 있을 그만큼의
─18쪽, 「나무로 자라는 방법」 부분
한편, 각각의 시들은 하나의 나이테를 의미하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집 한 권은 서른여덟 개의 나이테를 두른 제법 튼튼한 한 그루 나무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나무처럼 자라나고 있는 자신의 “어떤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음을 고백한다. 어느 순간 그 부분에 감정이 머물러 옹이 같은 깊은 흔적이 남을 테지만, 그 거리는 지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만나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린 “나”는 당신을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 이때 시는 태어난다. 그토록 열망하는 “당신”을 ‘나’로 편입시켜 더 이상 열망하지 않게 되기 전에, 거리를 만들어 영겁의 시간을 열망하겠다는 시적 의지는 이번 시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거리는 전작에서는 볼 수 없던 시적 태도이며, 전작으로부터 태어난 유희경의 새로운 시이기도 하다.
어떤 나무가 어떤 나무로 서 있는 동안
당신이 당신으로 걸어오는 그동안에
─18쪽, 「나무로 자라는 방법」 부분
나무들이 번식하여 숲을 만들 듯, 나이테가 겹겹이 쌓여 한 그루 나무를 울창하게 키우듯 기억은 사람의 일생을 이룬다. 기억 속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다. 당신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에 있다. 그곳이 ‘당신의 자리’다. 그곳이 ‘나’를 만든다. ‘나’를 우뚝 멈춰선 나무로 만든다. 시집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은 사적이고 은밀한 순간들을 시로 남겨둔다. 시는 박제의 기술이 아니다. 잊지 못해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다. 시인 유희경은 한 권, 서른여덟 편의 시들을 통해 이 지난한 과정을 낱낱하게 드러낸다. 이 ‘드러냄’을 통해 다시 한 번 다른 시인으로 거듭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이 시집은 지금껏 자신의 시에 대한 “각주”일 것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시인을 오롯이 이해하기 위하여, 이 시집이 필요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