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짐짝 취급된 존재들이,
서로의 수레를 끌어주며
해방을 위해 함께 나아가는 곳,
그곳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을 잇는
아름답고도 촘촘한 사유의 다리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작가, 예술가이자 장애운동가, 동물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해온 수나우라 테일러의 첫 단독 저작이 국내에 소개된다. 테일러는 선천성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가진 장애인 당사자로서 이어온 날카로운 통찰을 자기 자신의 몸을 넘어 비인간 동물들이 겪는 억압과 폭력으로 확장해 큰 주목을 받았고, 리베카 솔닛, 앨리슨 케이퍼, 캐럴 J. 애덤스 등 여러 페미니스트 작가들과 장애학자들로부터 ‘인간의 조건은 물론 동물이라는 범주에 대해 전적으로 새롭게 탐구하는 책’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한국어판을 위해 특별 수록한 홍은전의 추천 글은 이 책을 읽어야 할 또 다른 이유이다. 인권 및 동물권 기록 활동가로서 이 사회가 효율성을 이유로 손쉽게 배제해온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온 홍은전은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수나우라 테일러의 전복적인 세계관을 써내려간다.
이 책은 비장애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한편, 그 비판의 ‘인간 편향성’을 넘어선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가 없는 ‘비장애 신체(성)abled-bodiedness’을 정상’과 ‘표준’의 몸으로 제시하며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몸들을 배제하고 억압한다. 비장애중심주의에 대한 기존 비판이 억압받는 이 몸들을 ‘인간의 몸’으로 상정했다면, 테일러는 여기에 ‘동물/짐승의 몸’을 추가함으로써 전례 없는 교차성의 사유를 보여준다. 현실의 장애운동과 동물운동이 오랫동안 불화해왔음을 고려할 때 이런 시도는 무척이나 값지다. 동물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긴긴 역사를 가진 장애인들에게 ‘동물’이란 하나의 낙인이었으며, 일부 동물운동은 ‘지적장애인처럼 이성을 결여한 이들에게 권리가 있다면 동물이 권리를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장애인의 삶을 폄하해왔던 것이다.
테일러는 동물이 겪는 억압과 장애인이 겪는 억압을 교차적으로 사유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반목하게 된 이 두 운동을 다시 잇고자 한다. 비장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 종차별주의가 공모하는 폭력을 인지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놓치지 말자는 것, 이것이 바로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제안이다.
동물 그리고 장애인: 억압이 연결되는 순간
“마돈나의 <트루 블루>가 크게 흘러나오고 있다.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고, 빙글빙글 돌고, 방 안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닌다. 나는 잔뜩 흥분해 있다. 춤추고 싶어. 그러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꿈틀꿈틀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마다 주저앉고 만다. 처음 한두 번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번째로 바닥에 넘어졌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는 미친 듯 춤추고 있는 주변 아이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아, 이게 바로 장애구나’.”
태어날 때부터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수나우라 테일러에게 몸이란 언제나 질문과 탐구의 대상이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몸이 미군이 무단 폐기한 여러 독성물질이 상호작용해 만들어낸 혼합물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그를 가졌을 때 독성물질에 오염된 수돗물을 모르고 마셨고, 그 영향으로 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장애가 있는 몸을 비정상화하고, 장애를 순전히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비장애중심주의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 곳곳에 깔려 있었던 탓에, 사는 내내 자신의 몸이 똑바르지 않으며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했다고 테일러는 털어놓는다.
하지만 동물에 대한 깨달음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몸에 대한 깨달음이 굳이 깨달을 필요도 없이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동물에 대한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그를 강타했다. 그리고 몸에 대한 깨달음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닭을 실은 트럭’이 안겨준 충격에서 비롯된 그 깨달음은 ‘고기’라는 음식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동물들이 사과나 샌드위치 혹은 생일 케이크와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는 자기 고유의 삶의 경험과 욕망, 정서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를 한 덩어리의 고기나 한 컵의 우유와 무관한 별개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가?
이후 테일러는 어릴 때 본 트럭 안에 실린 수십 마리의 닭들을 그리면서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과 공장식 축산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비로소 어릴 때 자신이 본 트럭 안의 닭들이 사실상 모두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비장애중심주의가 장애인들을 비롯해 훨씬 많은 존재들을 포괄한다는 통찰로 그를 이끈다. 테일러는 ‘자립’ ‘생산성’ ‘효율성’ ‘정상성’ ‘자연스러움’ 등의 의미를 규정하고 측정하는 비장애중심주의가 우리와 함께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비인간 동물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새긴다.
물론 동물과 장애인이 똑같은 방식으로 비장애중심주의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은 적어도 그들의 동물성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병리화되지 않으며(장애는 언제나 의학이 개입해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된다), 장애인들은 (비록 자주 대상화되기는 하지만) 명백히 고기나 물건으로 가공되지 않는다. 이처럼 동물과 장애인은 분명 매우 다른 방식으로 소외와 지배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방식은 다를지라도 비장애중심주의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존재들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비인간 동물과 장애인의 삶과 경험 모두를 덜 가치 있고 폐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며, 그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억압들”을 만들어낸다.
동물은 어떻게 불구가 되는가?: 동물 산업과 공장식 축산 농장의 거대 폭력
이처럼 비장애중심주의가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동물은 장애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즉 장애라는 범주가 사회적 구축물이라면, 동물이 장애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테일러는 인간에게 고유하며, 인간 문화 안에서 유효한 ‘장애’라는 말의 의미를 비인간 동물의 삶과도 관계 짓는다. 그는 인간의 고의에 의해 ‘장애’를 갖게 되는 동물 산업 내부의 동물들에게 주목한다.
인간이 먹고 입고 쓰기 위해 사육하고 이익을 뽑아내는 ‘가축화된 동물들’에게 장애란 거의 태생이자 필연이다. 오직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 동물들에게 장애는 너무나 흔하다. 신체적 극한에 이를 때까지 품종 개변을 당해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는 것도 모자라, 평생의 삶을 자기 분뇨를 뒤집어쓴 채 비좁은 우리에서 보낸다.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많은 젖을 생산하도록 품종개변된 젖소, 자신의 거대한 가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 만큼 살찌워진 상태로 태어나는 닭과 칠면조를 떠올려보라.
동물들은 사육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장애와 손상에 노출된다. 닭, 칠면조, 오리 등 조류 동물들은 마취 없이 부리 절단을 당하고, 소와 염소는 (우유 생산을 위해) ‘임신-출산-착유’라는 끝없는 순환을 강요당한다. 죽음의 순간은 또 어떠한가. 미국의 대형 육가공 업체에서 근무한 노동자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일주일에 대략 7만 5000마리, 즉 4초당 한 마리꼴로 돼지가 도살된다. “절뚝이는 돼지를 다룰 때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돼지가 슈트에 들어가기 전에 파이프로 죽을 때까지 패는 거야. 이걸 ‘파이프질’이라고 하지.”
동물들에 대한 이런 폭력과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장식 축산이라는 거대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동물이라는 존재를 철저히 인간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동원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은 인간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먹을 고기(식육)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