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삶은 항소의 과정이다.말할 것도 없이 프란츠 카프카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를 읽고 배우며 다시 쓴 작가는 여럿일 것이다. 페터 바이스(Peter Weiss, 1916-1982)도 여기에 속한다. 바이스는 두 차례에 걸쳐 카프카의 소설 《소송》(1925)을 희곡화했다. 첫 작품 《소송》은 1975년에 브레멘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이 첫 작품은 그에게 여러 가지 점에서 탐탁지 않았고, 그래서 대작 《저항의 미학》을 10년 만에 탈고한 후 다시 쓴다. 이것이 1982년에 나온 《새로운 소송》이다. 그는 이 작품의 연출을 직접 맡았고, 3개월 후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 이것은 작가적 결산이 될 만한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문학작품이란 하나의 다의적 구조물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한두 개념이나 술어로 고갈될 수 없다. 《소송》이나 《새로운 소송》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의식이 배어 있다. 법과 판결의 자의성과 폭력성, 고통과 희생의 반복, 세계의 모호성, 승진에의 압박과 경쟁사회, 다가오는 전쟁, 매끈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는 세계의 부조리함, 이 부조리함 속에 개처럼 죽어가는 인간 생애 등등. 이것을 역자는 세 가지 - 부자유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자기기만(첫째)과, 이런 기만으로 인한 억압의 편재화(둘째), 이런 억압적 질서에서 추구되는 “어떤 다른 질서”의 가능성(셋째) -로 언급했다. 그러나 더 줄일 수는 없을까? 그것은 ‘자기기만의 복합체로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 사회의 많은 것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함께 어울려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상부층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중간계층이나 하부계층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일정한 자기기만 속에서, 작가가 지적하듯이, “이 기만에 헌신하며” 사는 까닭이다. 이들은 기만-부패-불합리로 인해 한편으로는 고통 받고 억눌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부패를 만드는 데 일조하면서, 그리하여 결국 이 부당한 메카니즘의 한 인자(因子)로 살아간다. 이것은 소시민들뿐만 아니라 이 소시민들의 허위의식을 직시하는 주인공 K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사람은, 마치 K가 그러하듯이, ‘자기 허약성에 무너지는’ 것이다. 모든 것의 무의미는 이렇게 순환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한 권력관계 아래에서 그 서열관계의 강압성이나 폭력에 희생되면서도 동시에 이 관계의 수혜자로 산다. 사람은 크고 작은 악과 거짓과 부당성의 거대한 공모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체계/관계에 대한 항의는 간단치 않다. 소송은 곧 삶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독일어로 소송은 ‘Prozeß’(process)이고, 그것은 곧 ‘과정’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 과정은 삶에 낯설다. 이것은 먹고 사는 생계의 급박함 때문일 수도 있고, 이해관계나 탐욕 때문일 수도 있고, 무관심이나 무지로 인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항의는 남의 고민이 되고, 먼 동네의 일이거나 다른 세계의 사건이 된다. 그리하여 거짓은 항구적 인간질서로 작동한다. 바이스의 《소송》과 《새로운 소송》이 보여 주는 것도, 마치 카프카의 문학이 그러하듯이, 결국 줄이고 줄이면 삶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어떻게 앞으로 살아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그것은 생각게 한다. 그 세부내용이 어떠하건, 삶은 억압과 지배권력으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는 한, 부자유한 삶, 편재하는 억압성, 인간관계의 권력화 등은 진보 혹은 보수의 독점적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 있고 양식 있는, 그래서 자기 삶을 주인으로서 살아가려는 시민이라면, 마땅히 정면으로 맞닥트려야 할 문제다.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나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굳이 이런 당위적 술어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성찰되어야 하는 삶 일반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지금 여기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삶의 강제질서가 ‘자기기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바이스의 통찰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