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 영국 PEN 어워드 2021 수상 ***
불복종에 관한 페미니즘의 새로운 방법론
부채를 벽장 밖으로 꺼내어 부채로 조직되는
우리 세계의 지도 그리기 작업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4년 1분기 기준으로 금융권 세 곳 이상에 채무를 진 다중채무자가 450만 명에 달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주지하듯이 한국의 부채 위험 수준은 국제결제은행(BIS)과 같은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가계부채의 정도가 가장 심각해, 부채가 개인과 가계를 얼마나 옥죄고 있을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부채가 수치심 혹은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부채가 행사하는 경제적 압박은 우리를 피폐하게 한다. 빚 때문에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 사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채가 개인과 가정,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방증한다.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아 강제로 구조조정을 받아야 했던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금융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몸소 경험한 바 있으며, 외환위기가 언제든 귀환할 수 있다는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복지와 사회적 서비스, 안정된 일자리를 대대적으로 축소하고 경제를 금융 주도로 확대한다는 것은 부채를 심화시킨다는 말과 다름없다. 부채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결코 부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을 받고, 의료비를 지출하고 사업을 벌이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택담보대출, 전세자금대출, 학자금대출, 사업자금대출 등 여러 형태의 빚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우리 일상은 촘촘하게 짜인 금융망에 포섭되어 있다. 이처럼 부채 없이는 재생산이 불가능하도록 우리를 폭력적인 환경에 결박하는 힘센 부채를 어떻게 이해하고 문제화할 것인가?
힘센 부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부채의 권력에 도전하기 위한 ‘벽장에서 부채 꺼내기’ 작업
『페미니즘으로 부채 읽기』에서 저자들은 우리 일상생활에 뿌리 내린 다양한 형태의 부채와 그 폭력를 이해하고 맞서 싸우는 데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을 ‘벽장에서 부채 꺼내기’로 든다. “부채를 벽장에서 꺼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개개인, 각 가구, 개별 가족의 부채를 벽장에서 꺼내려면 일단 우리는 부채를 말해야 한다”(31쪽). 흔히 부채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 즉 남들이 알면 수치스러운 일,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되는 도덕적 문제쯤으로 여기기 쉽다. 사실 이것이 부채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부채를 카드 돌려막기나 각종 대출을 관리할 때나 직면하는 ‘사적인 이슈’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부채의 권력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유발하는 부채의 권력에 도전하려면 부채 경험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행위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일단 부채를 벽장 밖으로 꺼내면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질문이 뒤를 따른다. 부채는 어떤 영역에서 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부채는 어떤 종류의 복종과 종속을 만들어내는지, 복종의 경제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부채가 이성애 가부장제 가족의 위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부채가 “어떻게 특정 형태의 삶에서 가치를 추출하는지, 일상의 생산 및 재생산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는지”(31)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그동안 철저하게 봉인된 부채의 성격을 가시화할 수 있고, 그것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의 문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으로 부채 읽기
왜 페미니즘인가?
유엔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간 부채에 따른 긴축으로 사회 서비스가 삭감되면서 빈곤 가구의 여성이 그렇지 않은 가구의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무보수 돌봄 노동에 쓴다고 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벽장에서 부채를 꺼내는 것은 부채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응답”(34)으로, 부채가 가장 심각하게 망가뜨리는 것이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기에 부채에 대한 페미니스트 독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재생산은 출산, 가사노동, 돌봄 노동부터 사회를 작동시키는 문화와 이데올로기 영역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주를 포함하는데, 오늘날 사회적 재생산 비용은 미시적인 동시에 전 지구적 공간으로 이해되는 가정으로 떠넘겨지고 있다.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기본 서비스 비용이 상승하면 수백만 인구의 일상생활에 빈곤과 변동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재생산의 공간에서 공적 자원과 공유 자원을 제거하면서 발전하는데, 이 때문에 개인은 자신의 소득만으로는 사회적 재생산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부채 없이는 재생산이 불가능해진다.
그렇다고 저자들은 여성들이 부채 작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다는 식의 피상적인 관찰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페미니즘으로 부채 읽기』는 자본주의 금융 자체에 관한 페미니스트 진단을 내놓는다. 무엇보다도 부채를 페미니즘으로 읽는다는 것은 금융의 추상화에 저항하면서 부채가 작동되는 구체적인 신체들과 서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금융이 작동하는 방식은 여간해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금융은 추상적이고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수치’의 영역에 속해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금융 지배가 행사한 이러한 추상화에 저항해 부채의 추상화 권력을 없애려면 추상적인 숫자로만 언급하는 금융에 관한 논의에 “육체, 목소리, 영토를 부여”(34쪽)해야 한다.
페미니즘으로 부채를 읽으면 부채가 여성화된 신체와 여성화된 노동 형태에 가하는 폭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드러낼 수 있다. 최근 새로운 형태의 부채는 이전에는 금융 착취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문을 직접 겨냥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수입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대출을 위한 신용이 제공되는 게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젊은이의 몸이 어떻게 전쟁터가 되는지 목격할 수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자본은 젊은이들을 불안정한 삶, 부채, (폭력적이고 붕괴된 형태일지라도) 핵가족에 복종하는 노동자로 만들어 자본의 가치 증식의 영토을 확장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가사경제를 떠맡고 있는 여성이 금융의 주요한 표적이 되어 금융 의무의 책임 있는 주체로 정당화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여성은 빚을 갚기 위해 어떤 조건에서든 아무 일이나 해야 한다. 부채는 강압적으로 더 유연한 노동 환경을 수용하게 하고 성차별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에 노출되게 한다. 그런데 ‘가정 폭력’을 비롯한 다양한 폭력이 증가하는 현상은 젠더 기반 폭력과 노동 폭력, 인종차별적 폭력과 제도적 폭력, 법체계에 의한 폭력과 경제 및 금융에 의한 폭력 사이 연관성을 보여줄 전체 지도나 연결 도식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고 저자들은 단언한다.
부채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부채에 맞선 불복종 운동
“부채는 우리에게 빚을 진 것이다”
저자들은 여성과 여성화된 신체를 저항할 자율성 없이 부채의 악순환에 갇힌 그저 피해자로 보기보다는, 부채에 대한 투쟁 방식을 조사하고 실험해 우리가 어떻게 금융에 대한 불복종을 확장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이는 페미니즘 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단계로, 바로 부채에 맞서 모의하기이다.
부채에 맞서 모의하기는 분석적 작업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페미니스트 액티비즘에 뿌리를 둔 불복종 프로그램의 일부를 구성한다. 저자들은 “지하의 연결점과 교차점을 만들어내서, 새로운 공통 어휘와 전례 없는 형태의 집합적 터득을 가능하도록”(29) 한 페미니즘 운동은 부채에 규율되기보다는“부채는 우리에게 빚을 진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되풀이함으로써 이 책을 마침내 불복종의 미래를 요청하고 열어젖히는 책으로 만든다.
저자들은 부채에 대응하는 페미니스트 행동이 궁극적으로 거부 행위를 함께 엮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불복종하며 ‘갚지 않기’라는, 불복종의 아카이브 역할을 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