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생애 최초 전작 장편소설!
문학인생 50년의 담금질, 거장 황석영이 피워올린 푸른 불꽃!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아주 쓸쓸한 장면들이었다. 어찌 가족뿐이랴, 불교에서는 백년 사이에 온 세상이 바뀌어 변하고 나타나는 것을 거대한 런던아이(London Eye)처럼 ‘수레바퀴의 한 회전’에 비유한다. 백년 뒤에는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거기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만 모두 사라지고 앙코르와트의 흔적과도 같이 무성한 밀림과 새와 나비들만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_‘작가의 말’에서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 있는 거냐?
“나는 이들 우리 속의 정령을 불러내어 그이들의 마음으로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 있는 거냐?”
2011년 여름, 지금-여기, 이곳은 과연 어디인지, 이곳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또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대가 황석영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 독자에게 묻고 답한다. ‘낯설고 낯선’ 천국과도 같은 이곳, 지옥과도 같은 이곳,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이곳, 모든 것을 쓸어버린 뒤의 폐허 그 위에 세워진 세상. 그는 우리에게 어떤 세상을 열어 보일 것인가.
천국보다 낯선……
버려진 문명의 이면, 그리고 그 위에서 자라나는 성장의 이야기
‘낯익은 세상’의 주무대인 꽃섬은 쓰레기장이다. 온갖 더러운 쓰레기가 넘쳐나는 이 세상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쓰레기장, 사람들이 쓰고 버리는 모든 물건들이 산을 이루는 진짜 쓰레기장이다.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쓰레기매립지인 이곳이, 생활의 터전인 사람들이 있다. 바로 ‘꽃섬’ 사람들이다.
황석영이 그려내는 꽃섬/쓰레기매립지와 거기에서 폐품 수집으로 먹고사는 빈민들의 생활풍속은 그 디테일이 풍부하며 상당한 박진감을 띠고 있다.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쓰레기와 마찬가지로 도시로부터 내몰린 사람들―그들의 야생적 삶을 그려내는 솜씨는 역시 황석영이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한 주인공이랄 수 있는 소년 딱부리에게 꽃섬은 한편으론 빈곤하고 더럽고 삭막하기 짝이 없으나 다른 한편으론 경이로움이 가득한 성장환경이다. 비록 산동네이긴 하나 ‘도시’에 속해 있었던 딱부리는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장이라는―도시와 전혀 다른―세계로 들어왔고, 그 속에서 초자연적인 것과 조우하며 인간과 사회 학습의 길로 나아간다. 딱부리의 이야기는 학교교육과 대척적인 자리에 놓이는, 이성과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자아의 성장을 예시한다.
언뜻 보기에 대가의 따뜻하고 슬픈 동화 같은 『낯익은 세상』은, 꽃섬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보느냐, 딱부리의 경험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지는 소설이다. 전자의 관점을 택하면 소비의 낙원을 구가하는 문명의 이면에 관한 소설이라는 점이 돋보이고, 후자의 시각을 취하면 최하층 사회 속에서 형성기를 보내는 한 소년의 학습과 각성에 관한 성장소설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낯익은 세상』의 메시지는 강력하다. 가장 빈곤한 것 속에 가장 풍부한 것이 있다. 황석영은 문명으로부터 폐기된 사물과 인간의 종착지에 문명에 대한 저항의 오래된 원천이 있음을 일깨운다. 꽃섬은 인간과 정령, 문명과 자연 사이의 경계선을 이루며, 빼빼엄마는 그 두 세계를 함께 살고 있는 꽃섬 주민의 대표 격이다. 샤먼의 풍모를 가지고 있는 빼빼엄마, 그리고 숲속에서 김서방네(정령들)과 함께 노는 아이들은 신과 정령과 귀신이 추방된 인간세계, 이른바 탈마법화된 세계에 대한 동화적 안티테제를 이룬다.
그러므로 다시, 일상이 마법-축제가 될 시간……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물건도 사람들도 모두 ‘버려진’ 곳이다. ‘못 쓰는’ 물건들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하지만 이곳에도, 물론 삶은 있다. 이곳의 일상에도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고, 술과 음식 앞에서는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운다.
『낯익은 세상』에서 작가는, 쓰레깃더미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체의 축제처럼 행하는 식사, 어른되기가 어렵거나 어른되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천진성, 자연의 질서에 대한 샤머니즘적 믿음, 전원시적인 농촌의 이미지…… 무엇보다도 세계의 마법을 기억하는 동화적 이야기구조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하여, 작가는 늘 우리 곁에 있으되 우리가 잊고 사는 그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마지막으로 가 닿은 그곳. ‘작가의 말’에 표제의 의미가 곡진히 밝혀져 있듯이, 이 소설의 풍경은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모든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처럼 ‘매트릭스’로서의 그 세계는 바로 우리 지척에 있다._‘작가의 말’에서
『낯익은 세상』에서 작가의 손길은 그의 어떤 최근작보다도 뼈아프다. 시간적으로 더 먼 실화를 질료로 하고 있으나 그것은 우리가 지나온 전사(前史)가 아니라, 당면한 현재로서 그리고 다가올 미래로서 존재한다.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읽어내는 거장의 통찰력은, 안으로는 “삼백오십만이 넘는 생명들이 우리가 사는 땅에서 생매장”을 당하고 밖으로는 후쿠시마의 원전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를 냉엄하게 심문한다. 인간이 겪고 있고 또 겪어야 할 고통은, 오로지 더 많이 쓰려 하는 바로 그들의 욕망이 직조해낸 것이 아닌가. 작가는 쓴다.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의 무대로 삼은 쓰레기장을, 오로지 동물적인 생존만이 지배하는 비참한 막장으로 그리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는 ‘지상의 삶’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비루한 현실이 존재한다. 아무도 ‘정을 주지 않았기에’ 폐기된 것들 속에는, 폐기된 인간들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제각각의 연유로 섬에까지 흘러들어온 그곳의 사람들은 가까이 할 수 없는 괴물로서만 그려지지 않는다. 한 소년의 때묻지 않은 눈을 빌려, 작가는 그들 역시 고귀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결국 다시, 희망은 우리에게 있다
이 소설에서 ‘생명’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났으되, 언젠가부터 철저히 망각해온 바로 우리의 영혼이다. 예컨대, 과거-현재-미래를 포개어놓는 작가 황석영의 통찰력은, 실제 소설에서 ‘겹의 시간’과 ‘겹의 공간’으로 구현된다. ‘푸른 불빛’이 이끌어가는 소설의 시공간적 상상은 『낯익은 세상』의 미학을 웅변하는 동시에, 물질을 쫓으며 폐기해버린 영혼의 빈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땜통과 딱부리가 김서방네 꼬마 정령을 따라 들어간 동네의 모습은 소설이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한순간이면서, “우리 곁에 늘 살고 있는” 모든 영혼들을 - 서로간에 정든 물건들의, 풀꽃과 새잎과 새싹의, 나아가 쓰다 버려진 것들 그 모든 영혼들을 - 우리에게로 불러모으는 초혼의식의 서곡이다.
“세상에 니들만 사는 줄 아냐?”라는 쓰레기섬의 대모신인 빼빼엄마(버드낭구 할미)의 마지막 절규가 잊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가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우리 영혼의 한 조각의 행방을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것들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사람 모두가 지어냈”음에도,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풀꽃이 흔들거릴 것이라는 소설의 결말은 이 소설의 책장을 덮고 문득 생각에 잠길 독자, 욕망의 잔해와 폐허에 “갇히고 싶지 않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