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시에서 뜨거운 비극적 열정을 통해 타자를 향한 열린 세계를 갈망하던 시인은 이 시집에서 그 열린 정신이 열린 마음과 열린 몸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과 눈물겨움을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상상력을 통해 보여준다.
[시인의 산문]
시를 쓴다는 것이 그 창작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어떤 구원과 같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오로지 내 자신에게만 국한시켜 말하자면, 시 쓰는 것이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는 나는 너무나 심각한 비관주의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만약에 내게 무언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도 믿음도 아니고, 내가 더없이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니라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며, 내가 해야만 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작은 변명-모기 흐느끼는 소리만한 작은 변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시에 대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믿음과 환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하더라도, 그러나 최소한 데뷔 시기를 전후하여 시를 쓰고 싶다는 열정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갖고 있었던 한 시인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시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없고, 시를 쓰고 나면 다시 읽어 보기도 싫고, 시를 쓰고 나서도 마뜩지가 않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뭔가 미진하고 아쉬워서 뭉그적뭉그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인, 메마른 불로의 시인.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게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단 한 가지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