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로젠봄, 영화 정전의 수립을 위해 나서다
그의 예리하고 해박한 영화 리뷰와 에세이를 통해 조너선 로젠봄은 예술, 오락, 그리고 상업으로서의 영화에 대해 새롭고 빛나는 통찰을 전해주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비평가로 꼽히고 있다. 현재 정전, 혹은 고전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도 낡고 시대착오적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접근처럼 격하되고 있다. 하지만 로젠봄은 영화 연구의 영역에서 반감을 사고 있는 정전正典이라는 개념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다. 그는 정전이 이렇듯 의심의 대상이 된 원인을 거대 영화자본과 그에 결탁된 저널리즘, 그리고 사회과학적 객관주의에 경도된 영화학계의 공모에서 찾는다. 즉 영화 연구는 미디어라는 단어 하에 TV, 게임, 인터넷 등을 포괄하면서 형식주의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판별할 예술적 가치 판단은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이는 정전이라는 개념을 무효화하려는 적극적 시도가 아니라 단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일 뿐으로 결국 공석이 된 정전의 자리에 자본의 이윤 추구의 시도가 들어서게 된다. 자본에 동조하는 매스미디어는 흥행순위로 영화를 가치 판단하거나 팬 문화에 편승하면서 반지성주의를 유포하게 되고 동시에 관객 수준이 저급하다는 이유로 정보 제공을 제한함으로써 대중들을 사실상 조작하게 된다. 그 결과 현재의 영화문화는 압도적으로 홍보담당자의 편의성 추구와 한 줄 짜리 리뷰 등으로 대변되는 할리우드의 홍보시스템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이들은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희생시키면서 그저 그런 영화들을 최고의 것으로 내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1997년에 AFI(미국영화협회)의 “위대한 미국영화 100편”은 자본이 자신의 욕망을 잘 드러낸 전형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데 로젠봄은 “야만적인 상업적 계략이고 친숙한 상품을 다르게 포장한 것”일 뿐이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100편의 영화를 꼽아『무비 워즈』에 수록한다. 『에션셜 시네마』는 그의 이러한 대안적 정전 구성의 시도의 연장선에 있다. 얼핏 보기엔 단순한 비평 선집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부록에는 그가 세심하게 선정한 세계 영화 1,000편의 리스트가 실렸는데 본문의 평론들은 이 리스트에서 언급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따라서 이 책 전체가 영화 정전의 복원과 그를 통한 미적 판단력의 회복이라는 프로그램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1,000편의 ‘최고의’ 영화 선정
이 책의 뒷부분에는 앞에서 본 대로 로젠봄이 직접 선정한 ‘개인적인 정전’으로 1,000편의 영화 리스트가 실려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그 리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책의 종결부에서 나는 대담한 시도로서 내 자신의 특별한 정전을 제시한 것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기술적이기보다는 규범적인 의미(그리고 제약하는 것으로서)의 정전으로서, 나 자신의 취향과 우선순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가능한(혹은 이상적인) 영화관람 리스트이자 혹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비평적 선언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그가 작성한 리스트는 그의 40년이 넘는 시네필로서의 영화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영화 선택에 있어 매우 유용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리스트를 스스로 작성하도록 유도한다는 면에서 도전적인 것이기도 하다. 국내에도 유명한 로저 에버트 같은 ‘대중적’ 평론가들이 꼽는 영화들의 목록에 비해 그 폭과 깊이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젠봄의 1,000편의 리스트는 영화사에 관심을 가진 관객들에게 영화 보기를 재정의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한국판을 위해 저자가 보내준 최신 리스트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1,120편에 이른다.)
신랄한 비평이 주는 쾌감
로젠봄의 글의 신랄함은 비판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는 20여 년간 대안 매체인 《시카고 리더》에서 비평가로 활동했는데, 전임자 데이브 커 Dave Kehr가 그를 추천했던 이유대로 “대안 언론의 자유로움을 최대한 누릴 수 있었다.” 검열과 외압에서 자유로운 환경을 활용하여 그는 자신의 정치적, 미학적 입장을 밀어붙였는데, 거대 기업이나 저명한 학자, 블록버스터, 동료 평론가를 비판할 때의 신랄함은, 쓴 소리는 찾기 힘들고 비판은 에둘러야 가능하며 대안조차 한없이 중심을 지향할 뿐인 한국의 영화문화에는 낯선 것이다.
로젠봄은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가진 문제로 아이러니를 너무 많이 던지다보니 일정한 형식의 믿음 혹은 불신을 추출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스타일이 거의 모든 것이 되고 내용은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흔히 ‘문제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평하면서 “표현주의적인 예술의 휘황함이 덧붙여지고 있지만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도덕적인 결론이란 것은 거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영화사적인 해박함과 통찰의 결합
『에센셜 시네마』는 방대한 영역에 걸치는 영화 및 작가들에 대해 깊이 있는 평가를 전해주고 있다. [이창], [M], [탐욕] 같은 이미 그 권위가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은 고전에서 출발해 야심적이긴 하나 적지 않은 결점이 있는 [씬 레드 라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 같은 영화들에 대해 언급하고 ‘기괴한 걸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인 [이르마 베프]나 [아크앤젤]을 다루고 있는가 하면 평자들을 양분시키다시피 했던 [아이즈 와이드 셧]이나 [에이 아이]같은 영화도 논쟁적인 자세로 평하고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비평적인 간격: 고다르의 [경멸]”에서 영화사적인 해박함을 바탕으로 한 그의 통찰이 유난히 빛을 발하는데, 그는 다소 난해하게 보일 수 있는 고다르의 이 작품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조셉 맨키위츠, 프리츠 랑 등의 영화들과의 연관 관계를 밝혀내어 [경멸]을 명쾌하게 설명함으로써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감지되는 석연치 않은 부분을 해소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에 대한 글인 “일상생활의 본질에 대한 노래들”에서는 자크 드미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그와 언뜻 보기에는 유사해보이지 않는 오즈 야스지로를 끌어들여 드미의 영화 세계를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국제주의자’로서의 비평가
영문학과 대학원생이던 로젠봄은 1969년 파리로 건너가 《필름 코멘트》, 《사이트 앤 사운드》, 《빌리지 보이스》에서 특파원 자격의 전문 리뷰어로 기고하면서 비평가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에 체재하는 동안에 그는 로베르 브레송의 [몽상가의 나흘 밤]에 엑스트라로 출연도 하고 짧게는 자크 타티의 조수 일을 맡기도 했는데 ‘시네필의 수도’ 파리가 가장 빛나던 시기에 파리 체험을 했던 셈이다. 이런 경험은 로젠봄을 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국제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국제주의적인 측면은 미국의 영화문화의 편협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고 반면에 해외 영화의 좋은 부분에 대해서는 열렬히 옹호하게끔 했다. ‘전 세계적으로 1960년생 중에는 왜 시네필이 많은가’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책 『영화의 변이 Movie Mutations』는 그 무렵 태어난 세계의 시네필-비평가 5인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스미 시게히코와는 상대방 국적 감독인 하워드 혹스와 마스무라 야스조를 상호 비평한다는, 독특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데에서도 그의 국제주의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TwoLanes
나에게 이끌림을 주는 예술의 방식이란 가슴 가득 채워지는 순수한 유희체험 바꿔 말해 비평가 로젠봄의 표현처럼 "너무 안이하고 너무 낭만적이고 너무 비정치적이고 너무 영화광적인 성향이 강한데 심지어 사회과학을 등한시하기까지 하는" 성향의 그것과 확실히 닮아있고 (그렇다고 앙드레 바쟁이나 그 잔당들 & 후예들인 카예 뒤 시네마의 기조나 코드를 전혀 선호하지 않기도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기에 삶이 Rental & Perishable 규칙에 따라 결국 흥청망청 살다 빈손으로 관짝에 들어가야 할 운명임에도 앞으로도 결핍을 느낀다거나 잘못을 깨닫고 수정을 가한다거나 타성에 의해 변질되는 등 어떠한 사유가 되었든 이 기질이 바뀔 일은 없다 그렇다고 마지막 부록 챕터에 있는 비평가의 탑 1000 시금석이라 불릴만한 리스트를 체크해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감상 경험 이빨 채우기를 할 목적으로 책을 구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입장도 태도도 시선도 방식도 글을 쓴 비평가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젠봄의 글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 있으니 그건 바로 읽는 이로 하여금 "끈임없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진솔한 에너지가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로젠봄은 업계 관련자로서의 경험과 그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활용해 영화를 소개함에 있어 특정한 시절로 스무스하게 워프하는 공간 도약을 시도하듯 그 당시에나 느껴질법한 공기를 리뷰란에 빼곡히 채우고 저간의 속사정을 예리한 메스로 관통해 날카롭고 심원한 시선들로 때로는 비야냥거리는 방식으로 웃음을 주고 또 때로는 무심한 체 하지만 호소하는 방식을 통해 묻혔거나 등한시되기 일쑤였던 명작들을 디테일하게 조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진심 어린 (sincerely) 접근법은 독자로 하여금 본인이 이질적인 태도를 갖고 있음을 딱히 의식할 필요도 없게 만드는 열띤 탐독이 가능한 마성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 홈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태워 없어지거나 팔려버려서 책장으로 하여금 은은한 여백의 미를 강조하게 하고 남아 있는 명저들로 하여금 결사대의 품격을 과시할 수 있도록 도울 일회성의 가치를 지닌 책들만 어림잡아 수백권에 이르는 와중에 (이건 구입해 마땅할 가치가 있는 책을 고르는 타율이 5할도 안된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르고 모든 책 주인은 내가 아니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거듭해서 읽을 만한, 소장해 마땅한 가치가 있는 (repeatable) 📚 이란 어떤 것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난 보르헤스와 에코, 테드 창의 저서들, 그리고 인생의 걸작 멜빌의 모비딕을 꼽아놓은 후 로젠봄의 에센셜 시네마를 가리킬 것 같다 👈
난데-없음
읽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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