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브뤼노 라투르 · 에세이/인문학
2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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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의 글 / 라투르는 누구이며 왜 중요한가? 01. 첫 번째 편지 -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과학기술의 자율성을 다시 생각하기 / 아르키메데스의 세 가지 기적 과학인문학이란 무엇인가 / 첫 번째 개념: 번역과 구성 02. 두 번째 편지 - 과학기술의 미궁 속으로 도처에 널려 있는 과학과 기술 / 두 번째 개념: 시험과 고장 개코원숭이, 외치, 쥘 베른, 그리고 현대인 / 근대화인가, 생태화인가 03. 세 번째 편지 - 이것은 왜 과학이 아니란 말인가 떠도는 발화체를 말풍선에 넣기 / 세 번째 개념: 논쟁과 기입 수사학과 증명, 그리고 능변 / 과학의 정치학 04. 네 번째 편지 - 과학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기 혁명의 역사, 명시화의 역사 / 실험실의 삶 속으로 실험실과 현실 세계의 얽힘 / 둘로 쪼개진 세상 05. 다섯 번째 편지 - 무엇을 할 것인가? 구획에서 난장판으로 / 과학을 세속화하기 세계들의 정치학 / 기술민주주의를 향하여 코기토에서 코기타무스로 06. 여섯 번째 편지 - 과학인문학이 그리는 하이브리드 세계 자연의 정치학 / 진정한 자연과학자, 다윈과 윅스퀼 아인슈타인의 시계, 뉴턴의 천사 / 지구로 돌아오기 무한한 유니버스에서 복잡한 멀티버스로 -감사의 글 -더 읽을거리 -옮긴이의 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과학기술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번역'된다 -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에서 경구피임약의 개발까지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한 최초의 전쟁기구를 만든 과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리적 힘의 강-약 관계를 전복하는 지렛대의 원리는 아르키메데스에 의해 공성전에서 맞선 두 나라의 군사적 힘의 관계를 전복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과학과 전쟁의 이런 친근성은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첫 번째 편지에서 라투르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아르키메데스와 히에론 왕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과학과 전쟁의 관계에 대한 망각, 즉 과학과 정치의 이분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준다. #1.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하고 몹시 기뻐하며 시라쿠사의 히에론 왕에게 자랑을 하러 간다. 히에론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그 원리가 실제로 유용한지 증명해 보이라고 하고, 아르키메데스는 성채 공방전에서 쓸 수 있는 전쟁기구를 만들어 시라쿠사를 공격하는 로마 군대를 홀로 격퇴함으로써 히에론 왕에게 과학의 위력을 실증해 보인다. 그러나 3세기 후 이 역사적 일화를 소개한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어떤 실용적 기술에도 관심 없는 고결한 순수과학자로 그려낸다.(26~34쪽 참조) 라투르가 지적하듯이 플루타르코스의 이야기는 모순과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분명 아르키메데스가 스스로 왕을 찾아가 전쟁기구를 만들고 '힘의 전복'을 몸소 실현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정치에 전혀 관심 없는 '고결한' 인물로만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플루타르코스의 이분법은 이후 서양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 정치와는 무관한 과학의 지고성과 고결성을 웅변하는 통설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라투르는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의 자율성이란 나중에 꾸며진 신화일 뿐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번역'의 방식으로 과학이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은 언제나 정치와 사회 등 여타 삶의 영역으로 '우회'하거나 그 영역들과 함께 '구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정치라는 서로 무관한 두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얽혀서 작동하는 두 종류의 '행위'가 있을 뿐이며, 이 행위들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결합-조립-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페미니스트 운동가 마거릿 생어는 원치 않는 임신에 발목 잡힌 수많은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학자 그레고리 핀커스가 만든 스테로이드 합성물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반면 핀커스는 자신의 발명을 피임약으로 개발할 자금이 없었고, 또 자신의 연구가 여자들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우려 또한 갖고 있었다. 이 둘의 고민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캐서린 덱스터 맥코믹을 만나면서 해결된다. 이들이 함께 손을 잡으면서 1960년에 경구피임약이 최초로 개발되기에 이른다.(41~44쪽 참조) 경구피임약의 개발 과정은 과학의 사회적 번역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 전 사후피임약 허용 문제를 둘러싸고 의료와 사회문제의 충돌이 있었던 터라 이러한 '번역'의 의미는 우리에게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구피임약의 발명에는 단순히 스테로이드의 과학적 발견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회적 '행위'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과학적 발견이 페미니즘 정치와 사업가의 재산이라는 '행위자'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경구피임약이 발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근대의 이분법적 구분과는 달리 실제 현실에서는 과학-정치-경제가 뗄 수 없이 붙어 있다. 라투르는 이러한 얽히고설켜 있는 세계를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세계'(코스모스)로 표현하며, 과학적 논란의 미궁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이 공통세계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화의 역사에서 생태화의 역사로 - "과학 없는 인문학은 개코원숭이들의 인문학일 뿐이다" 과학이 더 이상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면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라투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밀접해진다고 말한다.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의 행위, 기술의 사용, 과학을 통한 경유, 정치의 침입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물질화는 사회화요, 사회화는 물질화다"라는 모토가 나온 겁니다."(76쪽) 우리는 자연의 제약조건에서 서서히 해방되는 '근대화의 역사'를 거쳐 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더욱 밀착되는 '생태화의 역사'를 거쳐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농업도 유전학 실험실을 거치든가 최소한 종자선별기는 경유하게 마련입니다. 사회학자나 도시계획가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지 않은 도시계획과 고위공무원의 행위가 있을까요. 소아과 논문이나 심리학자의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초보엄마의 육아가 있을까요. 프로이트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랑싸움 따위가 어디 있겠습니까."(75쪽) 이런 점에서 라투르는 우리 시대를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 시대'로 일컫는다. 이런 과학기술적 우회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이 근대의 동역학 없이 가능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과학기술적 우회들을 경유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생명공학이나 원자력공학 같은 새로운 과학의 상당수가 공공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과학기술적 우회들이 예전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인식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후 온난화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기술의 결과는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여기서 인문학적인 조건이 고려되지 않은 과학은 위험하며, 과학 없는 인문학은 원숭이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랄한 비판이 나온다. 라투르가 '과학인문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연과 인간이 더욱 밀착되고, 과학과 사회가 더욱 얽히고설키는 우리 시대에서는 과학과 인문학, 자연과 정치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이 아니라 실험실이 있을 뿐이다 - 예기치 않은 사물과 사회의 변형은 실험실에서 시작된다 이제 라투르는 좀 더 과학의 내부로 들어가서 과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도대체 과학은 어떤 과정을 거쳐 과학으로 정립되는지, 또한 과학이라는 새로운 존재는 어디에서 탄생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과학적 방법론을 정확히 적용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사물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험실이야말로 과학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사물의 존재를 함께 탄생시키는 용광로라는 것이 라투르의 핵심 주장이다. 세 번째 편지에서 라투르는, 과학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오해는 과학을 단지 '인식의 문제'로만 보는 데 있다고 말한다. 자연에 숨겨진 과학적 진리를 누가 더 많이 발견하는지, 또는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지만을 물어온 것이 기존 과학이론가들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수많은 반박과 재반박, 무수한 우회와 번역 작용을 통해 실제로 인간과 자연의 '실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간 도착적인 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항상 과학적 문건들을 오페라나 서스펜스 스릴러 감상하듯 읽어왔답니다."(101쪽) 라투르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과학이 가진 야누스의 얼굴 때문인데, 과학은 공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진리'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실험실 속에서 의도치 않은 시험과 실험을 거치면서 끝없는 경합과 협상의 과정을 통과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존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의 탄생과 변형을 '인간'과 '물질'이라는 행위자들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인문학의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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